바야흐로 중앙은행 수난시대다. ‘중앙은행 독립성’이라는 구호는 고색창연한 구시대 유물로 전락했다. ‘인플레이션 방어’라는 전통적 가치는 전 세계적인 디플레이션 위협 앞에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린다. 국민 삶이 팍팍해지고 빈부격차는 심화하면서 각국 정치권은 희생양을 찾아 너도나도 중앙은행장 때리기에 한창이다.
‘글로벌 경제 대통령’이라는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예외는 아니다. 공화당은 “옐런 의장이 민주당에 편향적”이라며 FRB 통화정책을 의회가 감시하고 월가 대형은행에 대한 구제금융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을 올해 안으로 통과시킬 기세다.
‘민간 대형은행의 대표자’에 불과한 FRB가 ‘국민의 대표’인 연방 의회 감시도 받지 않은 채 미국 경제에 너무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게 그 이유다. 또 FRB가 금융위기 이후 천문학적인 구제금융과 돈 풀기로 월가 대형은행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조장하고 부자들의 배만 불렸다는 비판도 수긍할 만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이 ‘월가의 애완견’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는 공화당에서 나오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공화당은 왜 FRB의 힘을 빼놓으려 할까. 무엇보다 공화당이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게 근본적 배경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FRB에 칼날을 들이대는 이유는 양적완화 등에 힘입어 미 경기가 회복되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니꼽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01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제가 최대 화두로 등장한 와중에 FRB까지 정파 싸움에 휩쓸린 셈이다.
정치 외풍에 휘둘리기는 유럽중앙은행(ECB)도 마찬가지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2012년부터 “유로화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할 것”이라며 공갈포를 쏘아대더니 3년이 지나서야 겨우 전면적인 양적완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해관계가 다른 북유럽·남유럽 국가 사이에 끼여 손발이 묶인 탓이다. 하지만 뒷북 대응에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더 큰 궁지에 몰려 있다. 올 들어 신흥국들의 도미노 금리인하는 순수한 정책적 판단 외에 정권 유지에 목맨 정치권의 압력이 한몫했다. 심지어 일부 중앙은행들은 ‘국가 반역자’라는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받고 있다. 터키가 대표적인 사례다. 터키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 1월 0.5%포인트, 2월 0.25%포인트 내렸다. 하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리라화 가치가 연일 추락하는 와중에도 인하폭이 작다며 “독립성을 내세워 정부와 맞서지 마라. 높은 금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국가에 반역하는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더구나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해외 변수까지 눈치 보느라 죽을 맛이다. 당장 FRB의 기준금리 조기인상 가능성이 커지면서 외국인 자금탈출, 통화가치 급락 등에 시달리고 있다. 올해 말 국제유가가 반등할 경우 인플레이션까지 방어해야 할 처지다. 이 때문에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당초 불가능한 임무를 떠안았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하지만 재정고갈에 경기부양 카드가 바닥난 신흥국 정부는 중앙은행이 마법을 발휘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실책을 저질렀다가는 모든 비판을 뒤집어쓸 게 뻔하다.
한국은행 역시 저성장 장기화 우려가 커진 가운데 정부 등으로부터 전방위 압력을 받자 결국 기준금리를 깜짝 인하하며 항복 선언을 했다.
하지만 가계부채 급증, 외국인 자본유출 등 위험요인은 눈에 보이는 반면 소비·투자가 살아날지 의문이라는 회의론이 벌써 나오고 있다. 또 이미 통화전쟁이 불붙은 마당에 이주열 총재가 눈치만 보다가 때를 놓쳤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여러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다만 분명한 점은 이제 공은 정부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경기부진의 이유를 한은 통화정책 실패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는 누워서 침 뱉기에 다름 아니다. 이르면 오는 6월 FRB의 금리인상이 예정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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