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희 회장이 한국전 당시 포탄에 튀어 자신을 부상시킨 돌을 만져보고 있다(왼쪽). 워싱턴을 방문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고 있는 이병희 회장(오른쪽).
“고향 신의주 떠나올 때 기억 생생
광복 70주년인데 아직 못가다니...”
이병희 재향군인회 워싱턴 회장은 신의주가 고향인 실향민이다. 1931년 태어나 1946년 3월 15세의 나이로 월남하기까지 어린 시절의 추억은 그곳 외에는 없다. 서울에 계신 것으로 알려진 외삼촌을 찾아 무작정 발길을 남쪽으로 향한 것은 그 전해인 1945년 11월에 발생한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의 영향이 컸다. 이 사건은 중학교 학생 500여명이 ‘공산당 타도‘를 외친 ‘반소-반공’ 시위였다. 공산당 보안대와 소련군의 무력 대응으로 23명이 사망했고 1,000여명이 검거됐다. 당시 공산당 통치 하의 신의주에서 이병희 소년의 가정도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군청 직원이었던 아버지는 해방된 후 남한으로 피신한 상태였고 어머니는 다음 해에 돌아가셨다.
“외삼촌에게 가거라”. 남한으로 길을 안내하는 브로커를 찾아낸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떠나야 할 일이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짐을 싸는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 습관은 이 회장의 몸을 평생 감쌌던 군복처럼 운명적인 것이었다. 이 회장은 어제 일을 얘기하듯 또렷한 기억으로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청춘’을 담담하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준 만남들
황해도 해주의 모 중학교로 전학한다는 위장 서류를 들고 출발한 소년이 우여곡절 끝에 해주에 도착했다. 새벽 야음을 타 1시간30분을 더 가니 한 언덕이 나타났다. 브로커는 “여기서 북한 땅이 끝난다”고 말했다. 6.25 발발 전에는 그곳에 남한과 구분 짓는 국경이 있었다. 죽기살기로 언덕을 향해 뛰었다. 다행히 미리 약속을 해 놓은 장소에 가 아침을 먹고 미군 초소에 인계됐다. 수용소에는 이미 수 천 명의 피난민이 대기하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개성의 한 운동장에서 소독약 ‘DDT’를 뒤집어 쓴 뒤 각 지역으로 소개됐다. 특별한 연고지가 없던 소년은 서울로 가기로 정했다.
“서울에 온지 사흘째던가, 한 미국여성이 말을 걸어와요. 못 알아들었지만 이름이나 나이를 물었겠지요. 그 미국 여성의 관심과 친절은 어쩌면 내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였는지도 모릅니다.” 그 여성은 명동에 있던 USIS(미 공보원)의 직원이었다. 소년이 불쌍했는지 심부름이라도 시키며 돌봐줄 심산이었던 것 같았다. 고아들이 사방에 널려있던 시절에 소년에게는 천우신조였다. 3년을 그곳에서 보내며 영어를 배우고 야학을 다녔다.
인민군 출신으로 귀순해 국군 장교가 된 서진 대위와의 우연한 인연은 보다 구체적으로 소년의 진로를 결정지었다. 6.25가 발발하던 해에 그는 연안의 파견 대장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선에서 북한군의 동향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곳에 찾아갔다가 소년은 6.25를 만났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서 대위는 거기에 없었다.
간신히 배를 타고 탈출해 서울에 와 보니 서울은 공산군의 폭격으로 말이 아니었다. 서 대위는 시흥에서 1군단 창단 준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큰 형님 같이 의지하던 서 대위를 다시 찾아간 소년은 엉겁결에 1군단 창립 요원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충청도 괴산, 충주, 연천, 경주로 후퇴하는 1군단을 따라가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어엿한 학도병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한국전 전황을 꿰는 똑똑한 청년
하지만 소년은 아직 군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장교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글씨를 잘 써 군단 정보처에서 소위 ‘가리방’이라는 도구로 보고서를 등사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게 나중에는 단순히 서류만 만드는 작업을 넘는 엄청난 임무로 확대됐다. 밤새 들어오는 전쟁 관련 정보를 정리하는 일을 이병희 소년이 직접 매일 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은 1군단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포항, 속초, 양양, 고성, 함흥까지 북진하는 동안 계속 됐다.
이병희 회장은 “전쟁이 워낙 다급해 일을 잘하는 사람을 찾다보니 그나마 상황에 익숙해진 나에게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며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한국에서 대박이 난 영화 국제시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흥남 철수 작전의 한복판에 이병희 청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영화라는 특수성 때문에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거의 실제와 같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백선엽, 김종필, 그리고 이질
이후에도 청년의 적군 정보 분석과 현황 보고 작업은 계속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백선엽 장군이 불쑥 찾아왔다. 그리고는 청년에게 적의 동향이 어떠냐고 묻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군인도 아닌 청년은 백 장군에 전황을 보고해야 했다. 육군 본부 정보국으로 자주 심부름을 하며 정보 전문가(?)로 훈련돼 가던 청년은 김종필 중위도 만나게 된다. 5.16 주체 세력이었던 강신탁 장군과도 그 때 만나게 됐다. 젊은 장교들은 군인도 아니면서 야무지게 군 업무를 처리해 내는 청년에게 이구동성으로 “군대에 가라, 장교 시험을 봐라” 닦달하는 것이었다.
1951년 말. 결국 청년은 갑종 간부 시험을 보고 정식으로 군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훈련 당시 이질에 걸려 낙오될 뻔 했던 위기를 극복한 일은 이 회장이 가끔씩 언급하는 일화다.
“피똥을 싸면서 내 인생이 이렇게 낙오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 수 없이 매운 것을 먹으면 치료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보초 설 때 고추장을 훔쳐 왔죠. 고추장을 탄 물을 매일 보약처럼 마셨더니 낫더라구요.”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훈련을 마치고 40사단에 배치됐다. 정보 계통에서 일하기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원했던 부대는 아니었다. 임무는 미군을 병참 지원하는 전투지원단(Korean Service Corp)’을 관리하는 일. 이 때부터 미군과의 인연이 본격 시작됐다. 그리고 사선을 다섯 번씩 넘나들며 ‘진정한 군인’으로 변모해 갔다. 내 운명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도 몇 번씩 실감했다. 그 유명한 펀치 보울 전투에서 포탄이 터지며 날아온 돌에 골반에 금이 가 두 달씩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 원수 같은 돌멩이를 지금도 이 회장은 갖고 있다.
살아남은 것은 ‘신’이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1년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베일러 대학에 와 유학생으로 2년간 생활했다. 전공은 경영학이었다. 월남전 참전은 1967년 11월이었다. 월남에서는 채명신 장군의 특별 보좌관으로 근무하며 주민들을 대상으로 심리작전을 지휘했다. 이 회장은 미군이 엄청난 무기와 물자를 가지고도 전쟁에서 진 것은 주민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반면 한국군은 채명신 장군 같은 명장 아래 제법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런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미국서 바친 두 번째 제복 인생
미국 이민 신청을 해놓고 잊어버리고 있던 이 회장에게 1971년 영주권이 나왔다. 대령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미주 이민을 결정했다. 그해 4월30일 전역했고 몇 달을 준비한 후 비행기를 탔다. 외삼촌을 만나러 북한을 탈출했던 소년은 점점 고향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하와이를 거쳐 시카고에 정착한 그는 경영학 전공 덕분에 한 의학연구소에 취직해 18년간 일했다. 이젠 제복을 영원히 벗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시카고에 있는 동안 육군동지회, 화랑동지회 등 군 친목단체를 세워 활동했다. 1983년에는 재향군인회 시카고 지회를 정식 발족했다. 미국에 올 때 “군에서 해방됐다”며 좋아하던 아내(이인숙)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은퇴 후 아들과 딸이 있는 동부로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2001년 워싱턴으로 왔다. 이 결정과 행동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후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4년 지냈고 재향군인회 워싱턴 지회 회장은 현재 9년째 맡고 있다.
“참 감사해요. 아무 것도 모르던 나를 이끌어준 것은 조국이었어요. 조금이라도 자랑할 게 있다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나는 그저 혜택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갚으려 재향군인회를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남들은 말하죠. 그 정열과 시간을 돈 버는데 바쳤으면 부자가 됐겠다고.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돈도 좋고, 자기 계발도 좋지만 당신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광복 70주년인데 우리는 아직도 고향에 못가요. 신의주를 떠나올 때 까만 오바를 입고 학생 모자를 쓰고 기차 안에서 창밖 먼 곳을 내다보던 생각이 아직도 납니다.”
끔에도 못잊는 그 땅을 다시 밟을 때까지 이 회장은 ‘푸른 제복의 용사’로 살아갈 작정이다.
<이병한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