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내를 따라 사진찍기에 취미를 붙인 덕분에 은근히 주말을 더 기다리게 되었다. 아직은 카메라 다루는 법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인지라 무수히 눌러대는 셔터만큼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만나기 어렵지만, 쉬는 날이면 무조건 카메라를 차 트렁크에 싣고 근처를 기웃거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던 곳에 이런 풍경이 숨어 있었나 싶어 경이롭기도 하고, 계절의 작은 변화에도 더 민감하게 되었다. 미사를 마치고 뉴욕 업스테이트로 목적지를 정했다. 북쪽으로 향한 87번 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는 아직 떠나지 못한 가을의 뒷모습이 스치듯 지나갔다.
언덕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겹겹의 작은 산들이 눈앞으로 달려왔다 사라지고, 저 멀리 수묵화처럼 펼쳐졌던 산이 다가와 민낯을 드러내며 말을 걸었다. 빈 숲 깊숙이 스며든 늦가을 오후의 햇살은 겨울과 전선을 만들고 있는 듯 보였다.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이름 없는 들꽃에 눈을 맞추기도 하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이 여정에 스스로 만족했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자연의 신비를 목도하는 시간이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귀로에 섰다.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11월의 짧은 해는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어차피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는 목적지가 아니었으니 내비게이션에 길 안내를 맡기고 느긋하게 운전하여 돌아 올 참이었다. 지금의 속도로 2시간 30분이면 집에 도착한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고, 그동안 수차례 운전하고 다녔던 익숙한 길이었으니 어두운 밤길 임에도 짐짓 여유를 부렸다.
아내와 늘상 나누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새로웠고,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 서로 퍼즐 조각을 맞추어 가며 웃기도 했다. 음악을 들으며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점점 좁은 산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자주 다니던 고속도로가 점점 시야를 벗어나 보이지 않으니 차를 세워 집 주소가 바르게 입력되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도로 한 켠에 차를 세우고 시야에서 사라진 익숙한 고속도로를 가늠해 반대 방향으로 차를 돌려서 가 봤지만 어둠속에서 방향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은 고집스럽게 자신이 제시한 길로 되돌아가라고 반복할 뿐이어서 고속도로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기계음이 시키는 대로 산 속으로 차를 몰았다. 인적도 불빛도 없는 산길을 기계에 의지해 차를 운전하는 내내 불안이 엄습했고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잃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찾아 그렇게 30여분을 공포 속에 지나온 길 끝에는 눈에 익은 동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지나치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며 사진기를 들이대던 바로 그 동네였다. 빛이 사라진 그 길에서 헤매는 30분에 불과한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눈에 보였을 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미지의 세계라 부르며 그리워하고, 빛을 통해 바라본 세상에서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꿈꾼다. 그런데 막상 보이지 않는 찰나의 시간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나약함이라니…. 사람이 나누어 놓은 낮 과 밤은 하나의 허상임을 이제야 알겠다. 눈으로 보는 세상과 마음으로 보는 세상, 빛과 어둠이 만드는 다르듯 같은 세상, 그 안에서 내가 기억하는 오늘은 얼마나 허망하고 거짓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세상을 조각조각 나누어 보게 되는 잘못을 다시 범하고 싶지 않음이다.
어느덧 거리의 나무들은 그림자처럼 서 있다. 이제 곧 그 마른 가지에 오색 불빛이 별처럼 박혀 반짝일 것이다. 마른 나무가 불빛으로 생명을 얻는 시간이다. 오늘과 같은 시간을 다시는 만날 수 없으니 기억 안에서 오래오래 살게 해 두어야겠다. 2015년 가을과 겨울사이에 서 있는 나무 한그루를 사진에 담아 기억한다. 오늘은 가시거리가 맑고 바람이 불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관대한 하루가 되길 바란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