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중순이 되면 봄 방학이 돌아온다. 대학마다 한 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둘째 혹은 세째 주가 봄 방학이다. 추위에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나른한 봄기운에 기지개를 펴고, 학생들이나 많은 교수들이 따뜻한 남쪽 해변이나 캔쿤, 아카풀코, 혹은 캐리비안 여러 섬으로 크루즈를 가거나 휴가를 가는 것이 미국 대학생활 전통의 하나이다.
교수 한 분도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크루즈를 간다기에 몇 명이 가는지 물었다. 열다섯이 간다고 했다. 아니, 내가 알기에는 남편과 딸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아는데, 무슨 식구가 갑자기 열다섯으로 불었느냐고 물었다. 이 교수의 대답은, 나와 같은 한국 사람의 평범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 이었다.
소위 복합가족(Multiplex Family)이라는 말을 이제까지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복합 가족의 구성원이 누구인가를 듣고는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남편과 딸, 그리고 딸의 남자친구가 같이 가고, 남편의 이혼한 전 부인에게서 난 결혼한 딸 부부와 그들의 두 자녀, 남편의 재혼한 전처와 전처의 새로운 결혼에서 낳은 두 아이, 그리고 이 교수의 전 남편의 어머니 그러니까 전 시어머니라고나 할까, 모두 합쳐서 열다섯이 되는 셈인데……나처럼 머리가 단순한 사람은 이 모든 사람들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는 고사하고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언젠가 나는 이 교수가 이혼이 얼마나 정신과 육체에 상처와 고통을 주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20년 결혼생활을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오는 것으로 청산했을 때의 공허함은 말과 글로 표현한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들으며, 너그럽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들을 밑도 끝도 없이 용서하는 아내를 가진 나의 행복을 감사한 적이 있다.
이혼이 상처를 남기고 상처받은 관계가 순조로울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이혼한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관련된 가족과도 두루 잘 지낸다니 무엇이 우리와 다른 것 일까? 아니면 이 교수의 복합가족은 특별한 예외에 속하는 것 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자기 주변에는 자기와 같은 복합가족이 많다고 했다. 미국 사람들의 반 정도가 이혼을 한다니 이혼한 가정이 많은 것이야 흔히 볼 수 있는 것 이지만, 이혼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다시 커다란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상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가족이란 무엇이며 가족을 가족답게 하는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 것 일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사라졌을 경우에도 그 결혼이라는 관계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 일까? 부모와 자녀들의 깨어진 관계는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는 것 일까?
자신의 복합가족이 이루어진 기나긴 과정을 잔잔하게 돌아보며, 무수한 시간과 인내와 노력의 결실이 오늘 모두 같이 크루즈를 가는 복합가족이라고 했다. 겪은 수모는 말할 것도 없고,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들을 설득하고 가슴에 숨겨진 분노와 증오심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풀어가며 무너진 다리를 다시 세우듯이 상처받은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은 길고도 험한 길이었다고 했다.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이혼하는 사람을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슴 한 편에 지울 수 없는 물음이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혼을 이루게 한 사랑의 끈이 끊어져 이혼한 것을 이해하지만, 그 끈을 끊어지지 않게 할 수는 없었을까? 이혼한 후 복합가족을 이루기 위해 보낸 시간과 노력과 용서와 인내의 미덕으로, 끊어져 가던 사랑의 끈을 되살릴 수는 없었을까? 화초를 키우듯이 처음 사랑을 돌보고 북돋우고 물주고 거름 주고 쓰다듬고 안아주었더라면 그 처음 사랑의 끈이 끊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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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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