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왕비 앙리에트 마리에 경의를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윌리엄 세실 경과 함께 일한 향사(Esquire: 귀족 신분은 아니지만 영지와 투표권이 있는 계급) 조지 칼버트 경이 버지니아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오자 당시 국왕이던 찰스 1세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찰스 1세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한 후 가톨릭을 너그러이 대우했지만 그렇다고 가톨릭 신자인 조지 칼버트에게 국내에서 관직을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칼버트를 새로 볼티모어 경에 서임하고 포토맥 강에서 북위 40도에 이르는 토지를 봉토로 주었다. 국왕은 왕비 앙리에트 마리(Henriette Marie)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이 새로운 영지를 메릴랜드(Maryland)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칼버트는 아메리카로 건너가기 전에 사망했고 특허장은 그의 아들이 상속했다. 특허장의 조항은 메릴랜드의 영주가 국왕, 교회의 장 그리고 군사령관을 겸하는 입헌군주국임을 규정하고 있었다. 영주에게는 귀족을 임명해 장원을 내주고 시민의 권고와 동의를 얻어 법률을 제정할 독단적인 권한이 있었다.
메릴랜드, 가톨릭과 신교가 공존
볼티모어 경은 초기에 다섯 명의 남성을 거느리고 메릴랜드로 입주하는 향사에게 1,000에이커(약 122만 평)의 토지를 주기로 약속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이민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은 가톨릭 신자지만 국교파 국왕의 신하이기도 했으므로 볼티모어 경은 극히 신중하게 처신했고 신교도를 친절하고 공정하게 대우하도록 지시했다. 덕분에 메릴랜드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신교파의 감독교회가 서로 친근하게 공존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정책은 1649년 신앙 관용령으로 실천에 옮겨졌고, 종파가 무엇이든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신앙의 차이로 박해받는 일이 사라졌다. 신성한 삼위일체와 마리아를 모독하는 사람에게는 태형을 내렸는데 이 역시 매우 관대한 처벌이었다. 볼티모어 경은 1688년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지위를 유지했다.
프로테스탄트 혁명 이후 메릴랜드에는 국교교회가 들어섰고 가톨릭교회는 공식 예배를 올리는 권리를 잃었다. 이 조치는 메릴랜드의 가톨릭교도를 국왕의 적으로 만들었고 볼티모어 경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그 개종의 대가로 그는 영지 소유권을 보유했지만 통치권은 국왕에게로 넘어갔다.
캐롤라이나와 뉴저지
찰스 2세는 왕정복고 이후 찰스 1세가 볼티모어 경에게 그랬듯 충성을 바친 왕당파인 클라렌돈, 몽크 장군, 샤프스베리 백작 그리고 저지(Jersey) 섬의 지사를 지낸 조지 캐트리트 경에게 아메리카의 영지를 하사했다. 1663년 국왕은 네 명의 총신에게 버지니아의 남방에 있는 광대한 캐롤라이나 지역을 준 것이다.
이들 귀족은 당대의 인기 철학가 존 로크가 기초한 헌법을 채택했다. 로크는 매우 이색적인 문서를 작성했는데 그는 마치 기사가 도로계획을 하듯 장차 창설할 국가의 사회계급을 설정했다. 그것은 토지 5분의 1은 영주 소유로 하고 또 5분의 1은 새로 탄생하는 귀족에게 분배하되 이 토지는 농노가 경작하게 하며 그 나머지는 자작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귀족정치를 하겠다는 의도였지만 이민자에게 개방된 주인 없는 토지가 널려 있는 상황에서 귀족의 땅에 얽매이거나 면역세를 내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영주들은 얼마간 애쓰다가 결국 단념했고 1729년 캐롤라이나는 국왕에게 넘어갔다가 사우스. 노스캐롤라이나로 나뉘었다.
존 버클리 경과 조지 캐트리트 경은 1664년 요크 공에게 허드슨 강과 델라웨어 강 사이에 있는 땅을 사들였고, 캐트리트 경이 전에 통치하던 저지 섬을 기념해 뉴저지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그곳에 엘리자베스 시를 건설했고 코네티컷에서 이주해온 청교도가 뉴어크(Newark)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로 인해 영주가 의욕을 보이지 않으면서 1702년 뉴저지는 국왕의 직할 식민지로 넘어갔다. 새로운 국가 건설은 개인이 해내기엔 힘겨운 사업인 듯했다.
펜실베이니아
1681년 찰스 2세의 복위에 협조해 국왕에게 1만 2,000파운드(약 2,250만 원)를 빌려준 해군제독 아들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국왕에게 개인 특허장을 받았다. 덕분에 펜은 뉴욕과 메릴랜드 사이에 있는 땅 중에서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합한 것만큼의 광대한 토지를 영유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퀘이커교도들을 모아 자치정부를 조직하고 폭력이 아닌 애정으로 통치하는 ‘신성한 실험’을 해보려는 결심을 했다.
1682년 펜은 찰스 2세가 펜실베이니아라고 명명한 영지로 건너 왔고, 그곳의 아름다운 삼림과 강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아! 비참한 유럽에서 보던 불행과 분열은 조금도 볼 수 없을 만큼 한적한 이 땅의 아름다움이여!”
그는 수도를 필라델피아, 즉 ‘우애의 도시’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의 신성한 실험이 성공하면서 퀘이커교 교리가 그들에게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인디언을 친절하게 대했고 인디언도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여기에다 공정한 상거래 덕분에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자 다양한 이민 집단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대표적으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장로파, 독일의 루터파, 잉글랜드의 국교파 그리고 웨일스인 등이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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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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