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인디언들에 맨해튼을 사들이다
뉴욕 식민지는 영국이 점령하기 전에는 네덜란드의 소유였다. 1609년 헨리 허드슨 선장이 이끄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의 선박 하프문호가 이곳으로 건너 왔다. 허드슨 선장은 이곳에서 강과 천연 항구인 만을 발견했는데 후에 그는 이 강을 허드슨 강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그들은 강어귀의 화강암으로 이뤄진 섬에 상륙했고 이는 훗날 맨해튼으로 불렸다. 강변에는 나무가 울창한 벼랑이 있었고 그들은 오늘날의 올버니 시가 있는 곳보다 좀 더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의 경험담과 그들이 가져온 모피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했고 곧이어 많은 원정대가 허드슨의 뒤를 따랐다. 1621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특허상 뉴 네덜란드를 개발할 권리를 얻었고, 1624년 맨해튼 섬 한쪽에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촌락을 건설했다. 그리고 2년 후 60길더(네덜란드 금화. 역자 주)를 주고 인디언에게 이 섬을 사들였다.
월 스트리트의 기원
맨해튼 식민지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상술에 능하고 똑똑하며 진취적인 네덜란드인은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50명 이상의 이민자를 데려오는 주주에게는 광대한 토지를 내주었다. 당시 중역이던 반 렌 슬레어는 “우리는 농업을 위해 이 나라를 개방해야 한다. 이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다”라고 주장했다. 토지는 형식상 인디언에게 은화를 몇 푼씩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구입했다. 예를 들면 호보컨과 스태튼 아일랜드를 이런 방식으로 구매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허드슨 강 계곡을 끼고 가족의 초상화로 장식한 호화주택이 속속 들어섰다. 반 코틀란트, 반 렌슬레어, 비크먼, 스카일러 집안 등은 수천 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했다. 봉건제후 같은 이들 대지주 계급은 가난한 이민자들 사이에 커다란 불만을 빚어냈다.
뉴 암스테르담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네덜란드에서 벽돌과 타일을 실은 배가 들어오면서 시민들은 견고하고 우아한 주택을 건설했다. 항구에서는 네덜란드 상인의 화려한 옷과 모피, 잎담배를 가지고 모여든 인디언의 갈색 피부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영국인으로서는 자기들의 신세계에서 네덜란드의 영토를 보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1653년 두 나라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 네덜란드인은 맨해튼 섬을 횡단하는 방위 성벽을 구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뉴욕 금융의 중심지가 된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기원이다. 1663년 스토이베산트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로 “배가 가라앉았다”는 급보를 보내면서 증원병 급파를 요청했다. 하지만 독재적인 성격 탓에 신뢰를 잃어버린 그의 요청은 거부당했다.
네덜란드, 영국 군인 500명에 항복
결국 많은 영국 이민자가 롱아일랜드에 정착했고 그들은 네덜란드 총독의 명령에 저항했다. 여기에다 영국의 찰스 2세는 갑자기 뉴 네덜란드가 1498년 영국인 존 캐보트가 발견한 것이라는 희박한 증거를 내세워 영유권을 주장했다. 비록 그것은 옛날 이야기였지만 1664년 영국 함대가 허드슨 강에 닻을 내림으로써 그 이야기는 현실화했다.
리처드 니콜스 대령은 5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들이닥쳐 항복을 요구했고 스토이베산트는 패배를 인정했다. 주민들 역시 저항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여겼다. 그는 항복했고 영국은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한창 번영하던 식민지를 손에 넣었다.
영국 왕은 뉴암스테르담을 동생인 요크 공에게 하사했다. 이로써 뉴암스테르담은 뉴욕이 되었고 오렌지 요새는 요크 공의 또 다른 칭호를 따서 올버니로 바뀌었다. 동시에 요크 공은 오늘날의 델라웨어 주도 하사 받았다. 이곳은 처음에 스웨덴 인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그들은 그곳에 뉴 스웨덴과 크리스티나(현재의 윌밍턴) 항을 건설하고 있었다.
양키의 기원
특허장을 가진 회사가 건설한 여덟 개의 식민지는 제각각 다른 길을 걸었지만 혁명 때까지는 모두 국왕의 직할 식민지로 바뀌었다.
다른 세 개의 식민지, 즉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는 여전히 특허장이 있는 개인의 소유였고 나머지 두 개의 식민지인 로드아일랜드와 코네티컷에는 자치정부가 있었다.
식민지의 모든 주민은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무관심하기까지 한 본국 정부를 마음속으로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모든 식민지가 자기들의 의회를 통해 영국 왕실에 반역적이기도 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단 하나 뚜렷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북부와 남부의 차이뿐이었다.
북부에서는 청교도주의가 민중에게 현세에서 성공하는 게 최선의 길이라는 교훈을 심어주었다. 양키(yankee), 즉 뉴잉글랜드의 주민(양키의 어원은 분명치 않다. 일설에 따르면 인디언이 잉글리시를 잘못 발음한 것이라고도 하고, 불어로 영국을 뜻하는 앙글레 Anglais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한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선민(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한 민족)에 속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황무지에 엄선한 좋은 씨앗을 뿌리기 위해 도와주신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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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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