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백인 약 140만, 흑인 40만 명
북아메리카 영국 식민지의 1763년도 인구는 백인 약 140만 명, 흑인 약 40만 명이었다. 인디언은 숲 속으로 쫓겨났지만 변경까지의 거리가 해안에서 하루 걸음 거리밖에 되지 않는 지역이 많았다. 이민자들은 그들이 문명의 경계를 넘으면 두려움도 모르고 변덕스럽기까지 한 미개인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종종 새의 깃털로 치장한 인디언의 전통적인 머리장식, 흰 가죽방패, 검은 머리털, 그들이 전리품으로 여기는 피가 흐르는 두피 등의 꿈을 꾸며 무서워했다.
백인들 사이에는 여전히 계급 차이가 있었지만 본국처럼 뚜렷하지는 않았다. 일반인이 믿고 있는 것과 달리 남부에서도 명문가가 모두 신사의 후손은 아니었다. 물론 왕당파가 크롬웰 시대에 건너왔으나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민자는 거의 중류 내지 하류 계급이었다. 존경 받는 명문가의 가장으로서 아들을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 보내고 총독의 연회에 초청받으며 마차에 가문의 표지를 그려 넣고 많은 노예를 부릴지라도 그의 3대나 4대 조상은 이곳으로 건너온 뱃삯을 갚기 위해 하인으로 일한 비천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4륜마차 부자
북부에서는 초기에 성직자가 지배계급이었으나 이후 큰 상인과 선주가 득세해 이른바 신사 사회를 구성했다. 바다에서 나는 대구를 잡아 부유해진 뒤 대구를 가문의 표지로 정하고 신성시하는 집안도 적지 않았다. 매사추세츠에는 자가용 4두마차를 소유한 집안이 얼마 되지 않았고 일반인은 역마차와 역마를 이용했다. 보스턴의 변호사 대니얼 레너드가 금줄을 늘어뜨린 복장에다 그와 비슷하게 금줄로 치장한 쌍두마차를 타고 다니자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존 애덤스 John Adams(1735~1826, 제 2대 대통령.역자주)는 “모든 사람이 놀랄만한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지방에서는 아무리 나이가 많고 명성, 지위가 높은 사법관이나 변호사도 4륜마차를 탈 만큼 대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총독은 트리니티 교회에서 예배를 볼 때 까만 공단쿠션에 기도서를 받쳐 든 흑인을 거느리고 다녔다. 앞가슴과 커프스를 레이스로 치장하는 것은 부유층에게만 허용되었고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친 복장을 하는 장인은 처벌을 받았다.
심지어 대학에서도 좌석에 서열이 있었고 학생들은 기숙사 식당에서 가문의 높고 낮음에 따라 자리를 배정받았다. 장인과 농민은 주인장(Goodman), 그의 아내는 아주머니(Goodwife)로 불렸고 노동자는 이름을 불렀다. 그 아래가 하인이고 맨 끝이 노예였다.
서부로 떠나면 그만
아메리카의 계급제도는 그것이 싫으면 서부로 떠나면 그만이었으므로 현실적으로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변경의 미개척지는 평등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와 육체노동만 높이 평가받는 계급 없는 원시적인 사회를 제공했다. 5년간의 노역으로 뱃삯을 갚기로 한 노동자들은 5년이 지나면 앞다퉈 변경의 미개척지로 떠났다. 그들은 잘하면 자기 농토를 마련해 가정을 꾸렸고 실패하면 ‘가난한 백인(poor Whites)’으로 남았다.
남부에서는 노예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이든 실패한 사람이든 거의 평등한 대접을 받았다. 버지니아에서는 가난한 백인도 백인 대우를 받았는데 이는 고대 아테네에서 걸인도 아테네의 시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남부에서는 가난한 백인도 부유한 이웃처럼 대단한 물욕, 화려한 생활에 대한 동경, 쾌락을 즐기려는 취향 등을 지니고 있었다. 남부인은 흑인에 대해 정신적 불안을 느꼈지만 노예제도는 이미 확고한 사회제도로 자리 잡았다. 법적인 근거를 확보하기도 전에 실질적으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흑인을 두려워하다
175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에는 6만 명의 백인과 5만 명의 흑인이 있었다. 흑인은 현재의 흑인처럼 문명의 혜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미개인 상태로 있다가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농장주들은 흑인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나 마음속으로는 흑인을 은근히 두려워했기 때문에 종종 감정 대립과 폭력이 생겼다. 뉴욕의 중류계급도 흑인노예를 두려워했는데 그곳에서 1712년에 발생한 노예 반란으로 21명이 사형을 당했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노예가 소수에 불과해 인종 감정이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대신 가난한 백인이 계급 차별로 많은 곤란을 겪었다. 보스턴의 성직자와 큰 부자들은 매너가 좋지 않았고 영국의 귀족보다 태도가 월등히 거만했다. 노동자들은 신사들이 선거 날 외에는 자신들을 아는 척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당국은 임금 최고액을 제한하려 했으나 눈치 빠른 노동자들은 날품팔이 일꾼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여기에 굳세게 맞섰다. 얼마 후 그들은 유산계급과 동등한 공민권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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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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