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의 12제자인 야곱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펼쳐지는 전원의 풍경.
별이 비친 들판
살라만카에서 산티아고 데 라 콤포스텔라까지는 버스로 반나절 이상의 거리이다. 가는 동안 창문을 내다보니 유채꽃이 만발이다. 보기에는 좋았으나 유채꽃 기름을 얻기에는 이 기름진 땅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동안 잠시 휴식 차 조그마한 마을에 들렀다. 소위 산간벽촌인데도 생활에 여유가 보이고 평화 속에 성당들이 주민들의 깊은 신앙생활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목적지에 가까워 온다. 산티아고 순례 길에 대해서 머리를 정리해 본다. 서기 813년 이곳 갈리시아 지방에 떠돌이 수도사 ‘은둔의 빠이요’가 별이 비치는 들판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곳을 찾아 가까이 가보니 유골이 보였다. 그는 그것이 예수의 12제자 중에 한 명인 야곱의 유골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교황 칼릭스투스 2세의 의해서 인정을 받는다.
이곳을 산티아고 데 라 콘포스텔라(Santiago De La Compostela) 라고 부르는데 ‘별이 비친 들판’이라는 이름에서 유래 된 것이다
820킬로미터의 순례길
그때는 종교적으로 대립의 소용돌이가 치던 시대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리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세력 각축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아스트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가 이 사실을 이용했다 할까? 그는 이것이 이 땅에 이슬람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기독교 국가를 굳건히 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라며 야곱을 이 땅에 수호신으로 선포하고, 몸소 걸어서 이곳까지 순례의 길을 떠난다.
이것이 순례 길의 오리지널이다. 하지만 여러 순례길 중에서 가장 알려진 것이 프랑스의 야곱 (St.Jacques)에서 스페인의 야곱까지 820킬로미터의 순례길이고 이제는 이 순례길이 정식 코스가 된 듯하다. 학자들은 야곱의 무덤이 이곳에 있는 것은 그가 전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 했으나 그 시신을 이곳으로 몰래 옮겨 왔다고 하며 당시 로마와 교역이 활발했고, 그래서 광물 수송 배편에 운반할 수 있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문어와 올리브, 국수
우리 일행이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 우선 점심을 마친 후에 다시 외곽에 있는 호텔로 와서 급히 체크인을 한 후, 비록 두 시간 반짜리지만 조개 문양이 박혀있는 순례 길을 따라 걸었다. 무거운 백 팩을 짊어지고 피곤한 기색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한다며 만족하고 있는 순례자들 틈에 끼어서 걷는 것이 꽤나 기분이 좋았다.
세상은 변했다. 이제 이슬람 세력을 리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순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성취감에 행복해 있는 그 얼굴들을 보면서 이제 다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평화를 짓밟는 일이 벌어지기 말기를 바란다면 내가 너무 천진한 것일까? 그래도 나는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이슬람 신도들도 순례에 나설 날을 기대해 보았다.
이곳은 순례자들의 도착지답게 큰 행사가 곧 열리는 듯 무대장치를 하는 곳도 보였다. 또 한쪽에선 민속품 공연이 있었는데 결혼 축하연은 아닌 듯 했다. 왜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나는 중세기 그들의 의상이 어떤지 알아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오늘의 점심은 세상에서 가장 소프트하다는 갈라시아 지방의 문어를 올리브와 향료 샤프란 만 쓴 살라드에다가 밥 대신 국수를 쓴 빠에야((Fideus 라고 부른다)를 먹었다. 물론 와인도 있었다. 저녁은 해물 모듬이었는데 갈라시아의 특산 문어, 조개, 새우 등으로 된 요리이었다. 물론 백포도주가 제격이었다.
인구 20만에 공무원만 3만명
스페인은 17개의 자치구 그리고 50개의 주로 되어 있다. 또 카스티야 어가 정식 스페인어이고 그밖에 카탈루냐, 바스크, 갈라시아 어가 공용어이다. 그밖에 지방마다 그들 만의 언어가 있다.
우리는 빌바오로 가는 길에 지방언어가 공용어가 못되지만 그들만의 전통과 문화를 잘 지키고 있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보존지역으로 지정된 아스토리아스 주의 주도인 오비에도에 먼저 도착했다. 역사에 의하면 알폰소 2세가 아스토리우스 왕국의 수도로 이곳을 번창시켰다고 한다.
인구 20만에 3만 명이 공무원으로 정책적으로 도시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도시 전체를 마치 관광무대로 만든 듯 했다. 그러나 비가 너무 와서 별로 탐방을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먼저 들른 곳이 한국의 전통 시장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시장이라고 했지만 가게 대부분이 소시지, 돼지고기 고깃간 같이 온통 돼지고기 일색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현대화한 시장 이전에 전통 시장터를 보존하고 있었는데 시장터 가운데에는 아줌마 두 명의 조각, 그리고 계란, 닭 전문 건물터, 생선 전문, 우유 거래 등을 조각과 건물로 잘 보존하고 있었다.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면 저녁에는 야시장이 서는데 비가 너무 와서 점포들이 반 이상 열지 않았고 손님도 없어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알타미라 동굴로
점심은 큰 콩을 재료로 한 숲(Soup)과 여러 돼지고기 소시지와 대구 생선을 재료로 한 것이었다. 특이한 것은 파란 병에 든 술이었는데 식후에 마시는(dinner after drink) 달콤한 맛으로 아주 좋았다. 그리고 저녁은 이곳 외곽 호텔에서 먹었는데 닭고기로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일정보다 일찍 서둘렀다. 일정에 없는 알타미라 동굴을 보기 위해서이다. 알타미라는 ‘위에서 보다(Alta Mira)' 라는 뜻이다. 칸타브리아 지방에 있는데 찾아가는 언덕이 참으로 이름값을 할 만큼 아름다웠다. 또 아마도 구석기 시대에는 많은 사냥감의 동물들이 서식할 만한 곳 같았다. 동굴은 보존을 위하여 출입이 금지 되어 있고, 디지털 시대에 알맞게 완전한 복제 동굴을 만들어 놓고 관람시키고 있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그 그림이 14,000-18,000년 전 구석기 시대의 그림이라니 경이롭다.
구겐하임 박물관
알타미라에서 빌바오까지 가는데 다시 한번 싼티아나 라는 마을에 들렀다. 마을 전체가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세기 복장을 한 여인들이 안내도 하고 사진 포즈도 취해 주고 했다. 점심? 당연히 이곳에서 해야지. 문어 살라드, 양고기, 그리고 피테우스(밥 대신 국수로 만든 빠에야)이었다. 물론 음식만은 합격이었다.
드디어 우리는 빌바오에 도착했다. 한때는 마드리드 테러가 일어났다면 바스크 분리 독립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생각을 할 정도의 스페인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바스크이다. 사실 이들은 바다 건너 영국과 근접해 있고, 라틴족이 아니라 켈트족이다.
주된 산업이 철광과 조선이었다. 그러다가 조선사업이 스웨덴처럼 사양산업이 되고 덩달아 철광산업도 불황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었었다. 스웨덴의 말뫼는 덴마크와 연결하는 다리를 놓고 값싼 주택과 IT 산업으로 도시를 회생시켰다.
빌바오는 철재를 써서 도시를 꾸미어서 이미지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미국의 천재 건축가 ‘Frak O Gehry' 라는 구세주가 구겐하임 미술관을 만들어 놓았다. 20세기 최고의 건축물이자 모던 아트의 전당이라고 불리는 박물관 말이다. 이 관광의 명승지인 구겐하임 박물관에서 넘쳐나는 관람객들 틈에 끼어 오후 모든 시간을 보냈다. 충분히 그러할 가치가 있었다. 피곤한 오후이었지만. <다음에 계속>
<
이영묵 워싱턴문인회 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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