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동인도회사의 차
1773년 5월 부채에 허덕이느라 파산 지경에 이른 동인도회사는 런던에 1,700만 파운드(약 7,700톤)에 달하는 차의 재고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의 차는 압박하고 동인도회사의 차는 지원하기 위해 이 회사만 영국에서의 수출세를 면제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회사의 이사들은 중개인을 배제하고 일반 소비자에게 직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네덜란드의 차보다 값이 싸지면 빼앗긴 시장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이 계획은 애초에 어리석은 탁상공론이었다.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상인들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할 수 있음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다 같이 재고를 안고 있느라 허덕이던 보스턴의 상인들, 특히 재판사건 이후 정계의 중심인물이 된 존 핸콕을 격분시켰다. 여기에다 동인도회사 자체의 평판마저 좋지 않았다. 인도에서 이 회사는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반란을 조작해 토후를 몰아내는 등 갖은 비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그들이 무슨 사건을 조작하려는지 모두가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만약 그들이 차 시장을 독점한다면 그 다음에는 향신료, 명주에도 손을 뻗칠 것이었다.
-존 디킨슨의 항의
온건한 편이던 존 디킨슨은 그의 저서 《차세에 관한 두 개의 서신: Two Letters Concerning the Tea Tax 》에서 “다행히 우리는 인도의 주민이 아니고 자유 속에서 태어난 영국의 신민이다”라고 말하며 아메리카의 자유를 희생시켜 파산에 직면한 회사를 재건하려는 영국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이 정도로는 영국에 결정적 공격을 가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차 값을 9펜스 내리는 것이 왜 참을 수 없는 박해인지 대중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적어도 사건의 무대가 있어야 했는데 새뮤얼 애덤스가 우연히 이 연출을 담당하게 되었다.
동인도회사의 제 1선인 다트머스 호가 보스턴 부두에 닻을 내리고 있을 무렵, 시내의 올드 사우스 공회당에는 군중이 모여 흥분한 채 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새뮤얼 애덤스와 조시아 퀸시가 영국 국왕 조지 3세, 영국 의회, 영국 정부 그리고 동인도회사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새뮤얼 애덤스는 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우리 국가인 식민지를 구원하는 것뿐이다.”
-인디언 가장한 청년들
12월 16일 저녁 한 청년 집단이 떠들썩한 파티를 열어 과실주를 굉장히 많이 마셨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모두 모호크(Mohawk) 족 인디언으로 가장하고 있었다. 취기가 돌자 화려한 색깔의 깃털로 치장한 청년들은 부두로 달려가 조지 3세라도 이 티파티(Tea-Party)만은 못 말릴 것이라고 외치며 다트머스 호에 뛰어올라 차를 바다로 내던졌다. 이때 바닷물에 젖은 몇 잎의 역사적인 차가 유리병에 담겨 지금도 보스턴 박물관에 남아 있다. 다음 날 아침 온건파 중산계급은 앞으로 큰 값을 치를 가장(假裝) 파티의 경거망동을 통렬히 비난했다.
“인디언도 이런 야만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1만 8,000파운드(약 8톤)의 차를 폐기한 것을 두고 옳다고 말하는 사업가는 한 명도 없었다. 다른 식민지에서도 이를 비난했다. 프랭클린은 난폭하고 비합법적인 행동이 처벌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존 애덤스는 차의 폐기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 그들의 행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아 영국 정부가 좀 더 능란하게 일을 처리했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양자 간에 화해가 이뤄질 수도 있었다.
-영국 왕의 오만
그런데 조지 3세 정부는 능란한 수완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오만하게 굴었다. 그들은 강경했고 국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이제 식민지에는 승리 아니면 굴복만 남아 있다.”
1774년 4월 영국 의회는 아메리카가 ‘참을 수 없는 법률’이라고 부른 다섯 개 항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제 1항은 ‘차에 대한 배상이 끝날 때까지 보스턴 항을 봉쇄할 것’이었다. 이 경우 보스턴 시민은 생업을 빼앗기기 때문에 평화를 원하는 시민들까지도 혁명 세력으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다. 제 2항은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특허장을 개정해 국왕에게 식민지 의회의 의원 임명권을 부여하고 타운미팅을 금지할 것, 제 3항은 형사재판을 영국으로 이관해 영국 법률을 적용할 것. 제 4항은 군병을 매사추세츠뿐 아니라 북아메리카의 영국 영토 전역에 주둔시킬 것, 제 5항은 퀘벡법이라 불리는 것으로 ‘캐나다의 가톨릭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퀘벡 주의 면적을 대폭 확대 할 것’이었다.
다섯 개 항목의 ‘참을 수 없는 법률’은 미국인을 격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이것이 한니발의 침공 후 로마제국의 카르타고Cartago 정책보다 가혹하다고 규탄했다. 항구 봉쇄로 기아에 빠지게 된 보스턴을 구원하기 위해 전 식민지가 궐기했다. 코네티컷 식민지 주민은 양고기를,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주민은 쌀을 보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공동투쟁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각 식민지 대표로 구성된 대륙회의를 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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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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