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 DC에 위치한 구미외교위원부 건물. 1층은 사무실, 2층은 이승만 박사의 사저로 사용됐다. 오른쪽은 구미위원부 시절의 이승만, 김규식 박사.
해방 71년. 대한민국의 광복은 엄혹했던 식민지 시절에도 지치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투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내는 물론 만주에서, 중국에서,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항일운동의 깃발은 36년간 내려지지 않았다. 특히 세계의 수도 워싱턴은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외교가 펼쳐진 무대였다. 그래서 D.C.에는 각 열강에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여러 역사적인 현장들이 있다. 대한 독립의 열정과 헌신의 숨결이 배어 있는 D.C.의 유적지들을 찾아본다.
구미외교위원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사절기관>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 D.C.에 구미외교위원부(구미외교위원회)를 설치했다. 구미외교위원부는 1948년 9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폐지될 때까지 상해 임시정부의 미국 주재 대사관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한인 유학생, 동포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 독립공채 판매, 한국의 독립 승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초대 위원장은 김규식 박사였으며 1919년 9월 구미외교위원부로 이름이 바뀌면서 이승만 박사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해방 후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자 임병직이 위원장에 선출됐다.
구미위원부는 설립 이후 네 차례 이전을 했다. 첫 사무실은 D.C.의 1343 H St에 위치해 있었으며 1931년부터 34년까지는 1310 Park Rd, 39년부터 44년까지 1766 Hobart St, 44년부터는 4700 16th St에 있었다. 200평의 대지에 건평 60평의 2층 규모였던 마지막 구미위원부 건물은 아래층을 사무실로, 2층은 이승만 박사의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1기 위원부가 있던 건물은 현재 그대로 있으며 2기 건물은 개인주택으로, 3기는 가정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마지막 구미위원부 사무실 겸 사저는 워싱턴 제7일 안식일교회(Washington Seventh Day Baptist Church)로 사용되고 있다.
한인자유대회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1일까지 사흘간 워싱턴에는 미주 각 지역에서 100여명의 한인들과 미국 인사들이 모였다. 한민족의 자유독립을 위한 일치단결의 위력을 과시하고 3·1정신을 기념하려는 이른바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한 주미외교위원부와 재미한족연합회, 한미협회가 주최한 이 행사에서 이승만 박사는 개최사를, 존 카피 연방 하원의원, 아메리칸대학 더글라스 총장 등이 연사로 등장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군사적 지원을 촉구했다. 이들은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 건 등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한 5개항의 결의문도 채택했다.
이 역사적 회의의 현장은 816 16th St에 위치한 라파예트 호텔 미러룸(Mirror Room)이었다. 1971년 호텔은 사라지고 미국노동조합총연맹 본부 건물이 돼 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의 결과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됐다. 재미한인 단체들의 역량을 집중하고 확대시켜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주로 재정 모금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과 미주에서의 외교 및 국방 공작활동에 대한 재정 후원에 주력하였다.
조직은 의사부와 집행부를 두었는데 하와이와 LA에 각각 사무실을 두었다. 그러다 독자적인 선전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1944년 6월 10일 워싱턴에 사무소를 설립했다. 김원용 위원장, 전경무 선전부장 등이 미국 정계를 상대로 해외 한인들의 전쟁 참가 시도를 비롯해 각종 국제회의의 참가와 언론 활동, 집회 개최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호소하려 했다. 1719 K St에 위치했던 워싱턴 사무소 건물은 헐려서 없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한미협회
한미협회는 친한 미국인들이 1942년 1월 16일 워싱턴 DC에서 한국의 독립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해 미국인들의 동정을 얻기 위해 설립했다. 각종 회보 및 통신문의 발행, 언론 보도자료의 배포, 대중강연 등이 주요 활동이었다. 1943년 당시 한미협회는 이사와 위원으로 36명이 참여했고 이승만과 중국인 2명을 제외하고 모두 미국인들로 구성하였다. 당시 한미협회의 사무실로 사용한 888 17th St의 콜로라도 빌딩은 법률고문 스테거스의 소유로 현재는 아메리카 은행(Bank of America)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워싱턴 지역에는 1919년 10월1일 설립된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가 733 15th St에 있었으며 1943년 11월 김용중이 한국의 문화와 사정을 전파해 한국인과 연합국과의 친선을 도모하며, 연합국의 전쟁승리를 도와 한국의 독립을 돕기 위해 설립한 한국 사정사(1029 Vermont Ave) 등 여러 독립운동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
이종국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