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온 고은 시인, 워싱턴문인회서 강연
▶ 자신의 문학 역정 등 소개하며 정담 나눠

고은 시인(앞줄 왼쪽 네번째)과 워싱턴 문인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노(老) 시인은 레드 와인 한잔으로 그의 강연회를 시작했다. 말 보다 앞선 건 인사였다. 시인은 좌석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의 ‘고객’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정이 넘쳤다.
‘나의 시 쓰기’란 제목에 걸맞지 않게 언어와 한국어의 생명력이 강연의 주어였다. 시인 고은은 “전 세계의 언어 6,800여개 중에 죽어가는 언어가 급속도로 많아져 1세기 뒤에는 90%가 없어질 것”이라며 “영어와 스페인어, 중국어, 아랍어 등 4개 언어만 확실하게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이어 “한국어는 생명력이 강해 중국문화의 영향권 안에서 참 질기게 살아남았다”며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꼽은 1등 문자가 바로 한글”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밥 먹는 법은 잊어먹을 수 없지만 언어는 잊어지고 사라진다”면서 “한국에서는 해외 문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모국어를 갖고 미국에 이민 와서 모국어를 잊지 않고 글을 쓰는 여러분들이 놀랍고 경이롭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연 후 워싱턴 지역의 문인들과 마주 한 노 시인의 정담(情談)은 질의응답을 통해 더 유쾌해졌다.
동시를 쓴다는 김미영 씨가 “동시에 비어나 속어 등을 사용해도 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고 시인은 “동시는 언어에서도 충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며 “어린이들에게 모범적인 언어 세계를 일깨우게 해야 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의사이자 수필가인 양민교 씨는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며 묵은, 그러나 언제나 새로울 수밖에 없는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 오장육부를 통과한, 생살 터지는 노 시인의 명답을 기대했던 참석자들에 들려온 답은 엉뚱했다. “입은 있는데 할 말이 없네요.” 장내에 웃음이 터졌다. 시인도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일맥서숙문우회 대표인 이경주 씨는 그가 시를 쓰게 된 동기를 궁금해 했다. 와인 몇 잔의 가벼운 취흥에 노 시인은 살의와 폐허의 시대에 던져진 한 소년이 ‘시대의 언어’가 되기까지 오래된 문학 이력을 간단히 펼쳐냈다.
“중학교 1학년 때 시를 처음 접했어요. 이육사의 ‘광야’란 시입니다. 광야라는 그 무한한 공간, 이런 광대하면서도 낯선 언어를 처음 만났어요. ‘백마를 타고 온 초인’ 같은 시어도 가슴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나이에 어제나 오늘, 동네…이런 거 밖에 모르다가 말입니다. 만약 내가 김소월의 시를 처음 만났으면 나도 시를 안 썼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8.17 해방이 됐어요. 당시 중학교에 4킬로미터를 통학했는데 길에서 시집을 한 권 주었어요. 집에 와서 보니 ‘한하운 시초’였어요. 이 세상이 나에게 주기 위해 떨어뜨린 장물이었던 거지요. 그 시를 읽어보니 발가락이 떨어지고, 가도 가도 황톳길… 새벽까지 읽으며 엉엉 울었어요. 나도 재주가 있으면 이 사람처럼 시를 쓰겠다고 맹세한 거예요.”
‘순정 밖에 없는 소년’에게 6.25 동란은 인간이란 말조차 무의미한 절망과 허무로 이끌었다 한다. 그는 한 스님을 만나 입산했고, 효봉(曉峰) 스님의 상좌가 된 이래 12년 동안 만행과 정진의 세계에 자신을 가두었다.
“1958년 시 ‘폐결핵’을 내 친구가 투고해서 조지훈 씨의 천거로 시단에 데뷔했어요. 그해에 어느 신문사 국장이 내 시를 보더니 갈 데가 있다며 어디로 데려갔어요. 그 집이 바로 서정주 씨의 집이었어요. 그래서 서정주 씨의 추천도 받게 된 거지요. 남의 덕에 시인이 된 겁니다.”
그가 지향했던 화엄의 세상은 산이 아니라 길에도 있었다. 그는 환속했고 문단과 주흥(酒興)의 벌거숭이 같은 일원이 됐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숨결을 빨아들이며’ 진짜 시인이 되었다.
21일 저녁, 워싱턴문인회(회장 박현숙)가 우래옥에서 마련한 모임에는 고은 시인(83)의 시를 영역해온 안선재 교수와 김영기 조지 워싱턴대 전 교수 등 80여명이 참석해 가을 시정(詩情)을 나누었다. 워싱턴문인회 문집에 글을 써주기로 약속한 고은 시인은 의회 도서관 행사 등 모든 일정을 마치고 22일 귀국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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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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