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2년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올림픽 대표팀 행사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는 새미 리 박사.[AP]
올림픽 다이빙 종목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미국 다이빙계에 '작은 거인'으로 불렸던 새미 리 박사가 지난 2일 타계했다. 향년 96세.
USC가 3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리 박사는 지난 2일 뉴포트 비치 자택에서 숙환으로 인해 별세했다.
1920년 프레즈노에서 한국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157㎝의 단신이지만 미국 올림픽 역사는 물론 세계 다이빙사에 한 획을 그은 '거인'이다.
그는 28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던 1948년 런던올림픽 남자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우승해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 올림픽 금메달을 안겼다.
4년 뒤에는 헬싱키올림픽에서도 같은 종목 우승을 차지해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다이빙 2연패를 이룬 남자 선수가 됐다.
당시 백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다이빙에서 인종차별과 편견을 딛고 이룬 업적이라 의미가 더 컸다.
아버지의 희망이었던 의사가 되기 위해 학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1947년 USC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입대해 선수생활을 이어간 뒤 이듬해 올림픽 무대 정상에까지 올랐다. 나아가 올림픽 2연패를 이뤘고, 1953년 아시아계로는 유일하게 미국내 최고 아마추어선수에게 주는 설리번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1960·1964년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을 이끌었고, 1984·1988년 올림픽에서 2회 연속 2관왕에 오른 그레그 루가니스 등 세계적 스타 선수들을 길러냈다.
한인 사회에서 살아있는 이민 영웅으로 추앙받아온 그는 2010년에 '제5회 자랑스러운 한국인상'을, 2013년에는 한미우호단체가 주는 '올해의 미국 한인 영웅상'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새미 리 광장'이, 웨스트모어랜드 애비뉴에는 '새미 리 박사 매그닛 초등학교'도 있다.
고인은 1953~1955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강원도 평창이 2010년과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나섰을 때 명예홍보대사를 맡아 활동했고, 수차례 방한해 후배 대표 선수들을 격려하는 등 그는 자신의 몸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늘 잊지 않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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