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복지법 변호사로 일하다 보면 수많은 양로원들을 방문하게 된다. 찾아 뵌 분들 중에는 “내가 6.25사변 땐 병사들을 지휘한 장교였는데 이제는 이렇게 힘없는 모습이 되었다”고 한탄하시며 누워서 유언장을 서명하셨던 할아버지도 있었고, 아무도 살지 않는 집에 “빨리 가서 저녁상을 차려야 한다”시며 안절부절 하셨던 치매 환자 할머니도 있었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계속 해석 불가한 후두음 소리를 내셨던 할아버지와 그분의 주름 잡힌 손의 거칠한 느낌은 아직 기억 속에서 생생하다.
이분들은 이제 모두 작고하셨지만, 약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양로원에 가면 이분들 연배의 한인 이민 0세대 분들을 적지 않게 뵐 수 있었다. 그러나 0세대 분들은 해를 거듭하면서 조용히 사라지고 계시고, 아직 남으신 분들도 이미 우리 곁을 떠날 채비를 하고 계신 것 같다.
이민0세대 분들은 이민 1세 성인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에 오신 분들이다. 원래부터 미국에서 뿌리내릴 의도는 없으셨다. 타국 땅에 이민 온 자녀들의 뿌리내리기를 돕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1세 자녀들은 정착하고 사업을 일구어 내는데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니 좋았고, 0세 분들은 말년에 든든한 자녀를 곁에 두면서 손주들 자라는 모습 보는 낙도 있어 아마 좋으셨을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모두에게 유익한 윈윈 관계였다.
0세 분들은 주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 하셨다. 그래서 정착에 성공한 여러 1세들 뒤에는 보이지 않는 0세 후원자 부모님이 계셨다. 수많은 1.5세와 2세들이 0세 할머니의 주름진 손 밑에서 자랐다. 가끔 영어는 미국사람보다도 더 유창하게 하면서도 한국어는 청국장처럼 진한 사투리로 하는 2세들을 본다. 이들의 한국어 실력(?) 역시 이민 0세대가 남긴 흐뭇한 유산이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이루어진 많은 일들은 불가능했으리라.
물론 0세대의 정성이 깃든 노동은 정부 차원에서 공식 인정되는 노동이 아니었다. 아무리 열심히 집안일을 거들고 손주들을 돌보셔도 사랑의 노동은 삯이 없다. 사회보장 연금도 없고 메디케어 혜택도 없다. 무임금 봉사였으니 재산 모으실 기회 또한 당연히 없었다. 인생 황혼기에 이분들께서 상처럼 받은 혜택은 메디케이드였다. 재산도 없고 수입도 없으니 큰 걸림돌 없이 정부 혜택을 받으실 수 있었다.
메디케이드를 받아 성인 데이케어에 가면 동배들이 있으니 외롭지 않아 좋으셨을 것이고, 아직도 바쁜 1세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 수 있어서 마음 또한 홀가분하셨을 것이다. 가사가 힘들어 지면 간병인을 요청할 수 있으셨고, 거동이 불편해져 집 생활이 불가능해 졌을 때에는 양로원 입원도 하셨다. 저만치 멀리서나마 1세와 2세들의 성공을 빌고, 응원하고, 대리 만족하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이제 세월이 흘러 이민0세 분들께서 비우시는 한자리 한자리를 이민1세 분들께서 물려받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이민 1세대의 상황은 다르다. 오랫동안 일을 하셨으므로 은퇴 연금이나 부차 수입이 있으시다.
집도 있으시고 노후 자금도 모으셨다. 따라서 뇌졸중, 치매가 발병하거나 낙상사고가 발생해도 0세 분들처럼 쉽게 메디케이드 수혜자가 될 수 없다. 힘들게 일군 집과 재산의 상실을 막고 중산층 시니어를 위한 정부 혜택법에 의존하기 위해서는 이제 노후 계획을 요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이민1세 분들은 파란 눈을 가지신 미국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동일한 처지가 되신 것이다.
지금이 2세들에게는 0세 분들과 작별을 고할 시간이 오기 전에 그분들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기일 수 있다. 은퇴기를 맞은 이민1세대 분들은 이제 이민0세대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일구어 낸 것들 중 얼마를 보호하시고 가족을 돌보실 마지막 기회의 시기에 도달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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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양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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