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워싱턴 지역에 사는 이민자 중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넌 분은 이제는 없을 것 같다. 모두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는 얘긴데, 그렇다고 해도 비행기를 탄 곳의 시대별 차이가 있다. 김포공항 또는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이민자가 대부분이겠지만 여의도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탄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민사회에서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이민자의 본국에 관한 모든 것은 본국을 떠나는 그 시점에서 멈춘다’는 것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본인이 떠난 후에 많은 일들이 벌어지지만 이민자는 본국을 떠나던 그 때의 시각으로 본국을 바라다본다는 얘기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이 떠나온 그 시점의 본국 언어, 본국 문화에서 멈춘 사람을 자주 본다.
매년 이맘때면 사용되는 말이 있다. 구정(舊正). 최근에 도착한 사람이 아니라면 여의도 비행장, 김포공항, 인천공항 등 시절을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민자 사이에서 별 거부감 없이 사용되고 있다. 퍽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말이고, 본국을 떠날 때 널리 사용했던 단어인지라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익숙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제는 ‘구정’ 대신 ‘설’ 또는 ‘설날’이라고 말하자.
구정(舊正). 이에 대비되는 말이 신정(新正)이다. 구정과 신정 양쪽 모두에 ‘정(正)’이 들어있다. 음력 1월의 이름이 정월(正月)이다. 이 정월은 한 해의 첫 달(歲首)이라는 뜻이 있다. 정초(正初)라는 말에서도, 연하장에서 보는 하정(賀正)이라는 말에서도 이 ‘정’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그러니 여기의 ‘정’은 새해라는 뜻으로 보인다. 신정과 구정, 두 말할 필요 없이 신정은 양력 1월 1일을 말하고 구정은 음력 1월 1일을 말한다.
우리가 양력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종황제 시절인 1896년이라고 한다. 이 이전 음력을 사용하던 시절에는 그냥 ‘설’, ‘설날’만 있었는데,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설 외에 새로이 양력 1월 1일인 양력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양력설’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기존의 설을 ‘음력설’이라고 말하게 되었을 것이고. 일제 치하에서는 그들의 양력설을 강제하면서 기존의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하고 양력에 의한 설을 ‘신정’이라고 하게 되었다.
앞에 ‘구(舊)’라는 글자를 붙임으로써 기존 우리의 설을 낡은 것, 구닥다리 등 뭔가 어둡고 부정적인 분위기 쪽으로 유도하는 한편 자신들의 양력설에는 ‘신(新)’이라는 글자를 더하여 새로운 것, 참신한 것 등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시키려는 뜻이었을 게다. 그런 표현이 해방 이후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거치면서 계속되었다. 그러다 구정은 1985년에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1989년이 되어서야 ‘설’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참 오래도 걸렸다.
‘설’ 또는 ‘설날’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우리에게 돌아온 지 퍽 오래되었다. 구태여 ‘구정’이라는 표현을 아직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설에 즈음한 행사를 안내하거나 판촉광고를 할 때에 더 이상 ‘구정’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고 ‘설’ 또는 ‘설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게 좋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 것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 것을 사랑하고 존중해줄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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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 스프링필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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