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일왕은 1945년 8월15일 정오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조선인에게 맞아 죽을까 봐 짐은 싸는 둥 마는 둥 하며 일본으로 야반도주했다.
회사건 집이건 이들이 갖고 있던 온갖 재산은 그대로 남아 미 군정을 거쳐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의 소유로 넘어왔다. 일본인이라는 적(敵)이 갖고 있던 재산(産), 즉 적산이다. 광복 후 아무런 경제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적산은 이승만 정부에 아주 중요한 자본이 됐다.
이승만 정부는 약 10년에 걸쳐 적산을 민간에 헐값에 넘겼고 이 과정에서 적산은 엄청난 이권이 되면서 비리와 부패가 만연했다. 일부 종교 세력은 당시 특정 종교에 우호적이던 이승만 정부와 결탁해 적산을 불하받기도 했다.
한일 수교 논의가 한창이던 1960년대 초반 한국에 적산을 두고 자국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이 이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 논란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일본 정부는 적산에 대한 청구권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내용이 명시되면서 마무리됐다.
일본인이 살던 집인 적산가옥은 대개 2층 구조로 처마가 1층까지 내려오고 지붕의 기울기가 가팔라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적산가옥은 1960년대 양옥이 들어서면서 헐리기 시작했고 특히 1990년대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건립되면서 많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적산가옥으로는 서울 장충동·신당동·약수동 등에 있는 이른바 디펜던트하우스(미 군정 당시 군인 가족이 살던 집), 손혜원 국회의원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불러일으킨 목포 적산가옥 거리 등이 대표적이다.
25일자 서울경제신문을 보면 카페 등으로 개조된 적산가옥이 이국적 명소로 재평가받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적산가옥 가운데 일부는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다.
수많은 독립유적지가 방치된 것과는 대조적이어서 씁쓸하기만 하다. 적산가옥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 범죄자의 추한 잔재를 복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철거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지난해 2월에는 군산의 ‘근대문화거리 사업’, 부산의 ‘수정동 일본식 가옥 정란각’ 등 세금을 들인 적산가옥 홍보사업이 줄을 잇는다며 당장 중지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다른 시각은 기억하기 싫은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기에 이른바 네거티브 헤리티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3·1절을 앞두고 유관순 열사는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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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석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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