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만백성을 어루만지고 불교의 동량이 돼 정재(淨財)를 희사해 사찰을 세우시고…원하옵나니 대왕 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며…왕후의 신심은 수경(水鏡)과 같아 법계(法界)를 비추시고 불멸하시어…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익산 미륵사지석탑을 보수하다가 발견한 금제 사리봉안기에 새겨진 글귀다.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절을 짓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이 지은 현존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국내 석탑으로 국보 제11호다.
절터 넓이가 무려 8만2,600㎡(2만5,000평)로 국내 최대다. 지금은 이 탑과 부처님의 공덕을 표현하는 깃발을 거는 깃대를 세우는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경주 반월성 앞에 세워졌던 신라 최대의 사찰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다면 미륵사는 백제 불교 미륵신앙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무왕은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로 신라에 복수전을 펼쳐 선덕여왕을 큰 위기로 몰아넣었다. 무왕은 미륵사에서 가까운 왕궁리에 왕궁도 중건했다. 26대 성왕이 신라군에 전사한 후 흔들리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미륵사와 왕궁을 건설했다.
위례성에서 웅진성·사비성에 이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마한 왕궁이거나 신라가 삼국통일 뒤 세운 허수아비 국가 보덕국의 왕궁이었다는 소수의견도 있다. 2015년 모두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묶여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미륵사는 16세기 전후 황폐해졌고 석탑이 훼손돼 6층 일부만 남았다.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로 응급 보수했으나 구조 안전진단에서 불안정 판정을 받아 1999년 해체와 보수를 결정했다.
보수 과정에서 구체적인 창건 내용을 담은 유물이 나와 ‘서동요’로 유명한 백제 무왕과 왕비인 신라 선화공주가 절을 지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 중 최소한 선화공주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미륵사지석탑이 단일 문화재로는 최장인 20년의 보수 대역사를 마치고 30일 일반에 개방된다. 불교계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을 8일 앞둔 5월4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미륵사지탑 모형을 설치하고 점등식도 갖는다. 찬란한 백제 불교문화의 진수를 담은 문화재가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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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환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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