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이탈리아 피렌체.
영어로 출간될 소설의 원고를 타이핑하던 여성이 갑자기 이를 거부했다.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인 작가는 우여곡절 끝에 자비로 초판 100부를 찍었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2파운드씩 받고 팔았다.
뜻밖에도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점차 입소문이 퍼지며 공급이 달리자 해적판 출판업자들이 등장했다. 런던뿐 아니라 뉴욕에서 해적판이 15달러에도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영국인 소설가 D H 로런스가 1928년 출간했던 ‘채털리 부인의 사랑(Lady Chatterley’s Lover)’ 이야기다. 한국으로 말하면 마광수의 ‘2013 즐거운 사라’,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정도 된다.
지금은 외설 동영상이 인터넷에 널린 세상이지만 당시 영국은 겉과 속이 달랐던 신사계급이 주름잡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 직후라 커다란 충격이었다.
외설장면은 전체 700쪽 중 30쪽에 불과했지만 정황이나 심리묘사가 정교해 에로티시즘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도 있다. 줄거리는 귀족 부인이 전쟁으로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남편 대신 산지기와의 만남을 통해 참된 사랑에 눈뜬다는 것. 유한부인 시리즈의 원전이다.
이 책은 당초 영국에서 출간하려 했지만 출판사들이 기피해 이탈리아에서 나왔다.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는 판매가 금지되고 몰수됐다.
영국에서 30년이 지난 1960년에야 최초의 무삭제판이 펭귄출판사에서 출간됐다. 펭귄출판사가 출간 이후 기소되자 판사 로런스 번 경이 재판을 위해 이 책 페이퍼백(문고판)을 구입하기도 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재판은 결국 무죄 선고로 끝났다. 마광수와 장정일이 음란물유포죄로 모두 실형을 선고받고 마 교수는 대학에서 해직됐던 것과 대조된다.
지난해 10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 판사 번 경이 보던 책이 올라왔고 익명의 해외 응찰자가 5만6,250파운드(약 8,700만원)를 제시해 낙찰됐다. 하지만 영국 정부에서 이 책에 중요한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해외 반출을 중단시켰다.
영국 정부는 현재 해외 응찰자가 제시한 금액을 지불할 구매자를 찾고 있다. 오랫동안 외설서로 금지했던 소설을 이제는 문화재로 여긴다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나라는 어디쯤 와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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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환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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