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아버지(정조)를 여의고 열 한살이던 1800년 즉위한 조선 23대 왕 순조.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의 간섭 속에 힘겹게 왕위를 지켜가고 있던 그에게 1809년 태어난 맏아들 이영(효명세자)은 한 줄기 빛이자 왕실의 희망이었다.
용모가 준수하고 효성스러운데다 총명하기까지 한 효명에게 순조는 많은 기대를 걸었다. 네 살 때 왕세자에 책봉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며 왕위 계승자로 키워나갔다.
순조의 기대대로 효명은 미래 왕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보였다. 열살 때인 1819년에는 풍양 조씨 가문 조만영의 딸(신정왕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안동 김씨가 호령하던 세도정치판에 풍양 조씨가 또 다른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다.
효명이 18세가 되자 순조는 자신의 건강이 안 좋다며 대리청정을 명했다. 왕실권위 회복을 꿈꾸던 젊은 세자는 새 인물을 널리 등용해 외척인 안동 김씨 세력을 위축시켰다. 특히 호적법을 정비하고 형벌과 옥사를 신중하게 하도록 한 것은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신정왕후와의 사이에 왕자(헌종)를 낳았으나 대리청정 3년여 만인 1830년 4월 각혈한 후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 나이가 스물한 살. 사후에 익종을 거쳐 익황제로 추존됐다.
효명을 통해 왕실 중흥을 도모했던 순조는 허망한 죽음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직접 쓴 제문(祭文)에는 아비의 애통한 마음이 녹아 있다.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 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슬프고 슬프다.”
효명은 이렇게 짧은 생을 살다 갔으나 정치·문학·회화·건축·궁중음악 등 다방면에 성취를 남겼다. 흥선대원군의 치적으로 알려진 경복궁 중건도 애초 효명이 이루려던 일이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효명은 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경헌시초·학석집 등 여러 문집을 지었다. 여기에는 400편이 넘는 시가 수록돼 있다.
3년 전 방송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배우 박보검을 통해 엿봤던 효명의 삶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 28일부터 오는 9월22일까지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특별전을 진행한다는 소식이다.
전시실 일부가 효명의 서재인 ‘의두합’으로 꾸며지고 대리청정 당시 기록인 ‘대청시일록’ 등 유물 110여건이 선보인다니 짬을 내 비운의 세자가 남긴 자취를 둘러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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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훈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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