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슴 벅찬 감동이, 때론 말 못할 슬픔과 절망, 고단함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특히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에게는 결이 다른 스토리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내장돼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속, 이제는 잔잔한 강물처럼 침잠됐을 워싱턴 지역 한인들의 초기 이민생활의 애환과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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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온 지 1년 만인 1987년 9월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유아원 보내는 비용이 주급으론 감당 안 돼 직장을 그만두고 살림만 하게 되었다. 당시 시부모님은 딸네에서 조카 둘을 봐주고 있었다.
아기가 6개월 되던 봄, 두 분은 나에게 그 집 살림을 맡기고 한국 여행을 가셨다. 두 분이 사용하던 지하실 방에 거주하며, 살림과 어린 조카 둘도 보게 되었다. 아이를 지하실에서 키우는 것이 께름칙했고 모든 것의 초보지만, 여행 기간만 봐주는 거라 걱정하지 않았다.
집안일을 할 때마다 아이와 같이 움직이다 보니 지하실과 위층 온도 차이로 매일 콧물과 기침을 했다. 또한, 보행기 타던 아이가 지하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도 발생했다. 외상은 없지만, 처방전으로도 열이 내리지 않아 일주일 만에 다시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아이가 급성 뇌막염으로 위급하다고 직접 수술실 예약을 했다. 의사 사무실에서 수술할 병원은 1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아이를 안은 채 울고, 남편은 조금이라도 빨리 병원에 가기 위해 서둘렀던 그 시간은 지옥 같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대기하던 의료진은 아이를 수술실로 데려갔다. 위험한 순간은 넘겼지만,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까지 3주가 걸렸다.
아이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의료진은 엄마의 품에서 떨어지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온종일 안고 있는,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일하는 남편은 밤에만 왔기에 더 안타까워했다. 퇴원해도 된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엄청난 병원비가 나왔다. 의료보험도, 돈을 마련할 곳도 없어 낙담하고 있을 때, 같이 일하던 동료의 소개로 병원 내에서 일하고 있는 한인 분을 소개받았다.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같은 한인이 그리고 이민 선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와준 그분의 노력으로 병원비가 대폭 깎였고 잔금도 18개월 분할로 갚게 되었다. 또한, 간호사들의 염려로 검진을 해보니, 놀랍게도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 자신도 느끼지 못한 몸의 변화를 그들은 예견한 것 같다.
그들의 관심과 배려가 없었다면, 아픈 아이만 신경 쓰느라 나와 배 속의 둘째는 건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심에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돕던 그들을 통해 나눔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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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원 / 로럴,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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