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슴 벅찬 감동이, 때론 말 못할 슬픔과 절망, 고단함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특히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에게는 결이 다른 스토리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내장돼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속, 이제는 잔잔한 강물처럼 침잠됐을 워싱턴 지역 한인들의 초기 이민생활의 애환과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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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솔 불어대는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곧 하나의 멜로디 되어 나비같이 펄렁이는데 그 들려오는 가락에 귀를 기울여보니 슈만의 피아노 소품 빠삐용 제 1번이었다. 연주시간이 1분정도 밖에 안되는 짧은 곡이지만 왈츠풍으로 펼쳐지는 8분음표들의 생명의 몸짓을 느끼며 나는 어느덧 시간 여행 속으로 들어가 음대생이 되어 있다.
1976년 3월 5일 요셉의 꿈을 품은 채 김포공항을 떠나 이튿날 세인트 루이스에 도착하여 3일간 몸을 풀고 인근 중학교에 들어갔다. 들어간지 6개월도 안되어 아버지는 교장의 편지를 받고 교장실로 오셨다. 이 학교에서는 나를 도저히 가르칠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중언어 교사도, 교육프로그램도 없었고 영어 한마디 못하는 이민자의 아이를 도저히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이렇게 응수하셨다. “교육이란 한 사람을 놓고 하는 것인데 교육제도가 가장 발달했다는 이 나라에서 이민자의 자녀를 가르치기를 포기한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이 한마디에 고개를 숙인 교장 선생님. 학교에서는 별도로 동양인 보조교사 한사람을 나를 위해 고용 해주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문화충격속에서 99.9퍼센트 백인학생들 틈에 끼여 당시 결코 피해갈 수 없었던 인종차별이라는 용광로를 머리에 인 채 각고의 노력끝에 고등학교 졸업식날 단 한명에게 주어지는 최우수 음악상을 받았을 때에 내 앞에 나타나 손가락으로 자신들의 눈을 찢어올리며 나를 놀려대던 백인학생들이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그 후 음대에 진학하여 피아노와 작곡, 지휘를 전공하며 끝없는 이민자의 행보를 이어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한가지 화두, 나는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 시민권을 받았으니 이제 법적으로는 미국인인데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한국인이었다. 미국과 한국이 싸우면 넌 누구편에 서서 싸울 것이냐는 조롱섞인 질문을 수도 없이 들어가며 창공에서 품었던 요셉의 꿈을 계속 떠올리며 나의 정체성을 조각해나갔다. 요셉은 경계인으로서 한 인간의 빙점의 승리를 일구어 낸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살아온지 벌써 44년이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자신의 국적과 인종에 대한 정체성에 갇혀 살기보단 인간 빙점의 재발견과 승리, 그리고 그에 따른 참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고 그들과의 교감을 통하여 삶이란 살아볼만한 것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국가와 인종을 뛰어넘어 인생의 빙점을 찾아 빠삐용의 8분음표의 생명의 몸짓들처럼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한 경직된 틀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빙점을 향한 원초적 출발점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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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권 / 성프란시스 성공회 신부·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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