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영화를 보고 자랐다. 60년대 후반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로 접한 영화의 세계는 ‘웨스턴’의 비중이 컸다. 전설의 총잡이, 누가 제일 빨랐나 그런 제목의 특집이 소년잡지에 실리곤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수난의 역사에 눈을 뜨기 이전의 얘기다.
기억에 가장 선명한 서부극은 ‘보난자’였다. 1959년에서 1973년까지 14시즌을 장수한 NBC의 인기 드라마다.
어린 나는 보난자가 우리말인 줄 알았다. 서부 하면 보안관이니 그 비슷한 것이겠지 어림잡았다. 중학생이 되니 화면의 알파벳이 보였다. Bonanza. 그게 노다지, 대박의 뜻인 줄은, 영어도 아닌 서반아어인 줄은 알 턱이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발음부터 우리말처럼 여전히 친근했다. 비슷한 시기에 리처드 킴블의 ‘도망자’(The Fugitive, 1963-1967, ABC) 역시 인기 드라마였고, 훗날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목격자’(The Witness, 1985), 또 사랑의 배신자여 하던 노래도 당시에 있지 않았나.
보난자의 배경은 1860년대 네바다. 주로 승격되기 전의 미국령, 테리토리 시절이다. 1859년 이곳에 거대한 은광맥이 발견됐고 그보다 십년 앞선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처럼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버러시다.
컴스탁 로드(Comstock Lode)라 불린 이 은광맥 위에 광부들의 캠프가 차려지고 그렇게 형성된 도시가 버지니아 시티(Virginia City)이다. 그리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타호 호수를 낀 주인공 집안의 드넓은 폰데로사 목장(Ponderosa Ranch)이 드라마의 무대다.
폰데로사는 라틴 어원으로 목재용으로 쓰이는 크고 튼실한 소나무를 말한다. 목장 자체는 드라마상 가공의 지명이다. 버지니아 시티는 우리가 사는 버지니아주와는 무관하다. 초기 광부 한 사람의 별명에서 나왔다나 그런 설이 있다는 정도.
아직도 기억하는 4부자의 이름 역시 내 귀에는 근사하게 들렸다. 아버지 벤, 맏형 느낌의 아담, 고무호스처럼 뚱뚱한 호스, 막내같은 막내 리틀 조의 성씨는 카트라이트. Cartwright.
영어를 배우면서 테일러, 베이커, 메이슨, 스미스, 카펜터스 그런 이국적이고 근사한 이름들이 일상의 직업에서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중종 시대 배경의 사극에 등장하는 이름도 성도 없는 갖바치 같은 인생들. 내 안에 젖어 있던 서구 판타지를 깨는 데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그 역시 부러워해야 할 것 아닌가도 싶다. 손을 쓰고 몸으로 먹고 사는 행위에 대한 떳떳함이랄까. 의미도 없는 한자 성을 돈 주고 사서 없는 조상 내세워야 비로소 사람 대접 받던 것보다 낫지 않을까.
말이 길어졌는데, 카트라이트라는 이름 역시 생업에서 나왔다는 걸 알게 된 건 최근이다. 켄 폴릿의 대하소설 ‘대지의 기둥’을 뒤늦게 읽는 중에 라이트(wright)라는 단어를 만났다. 눈에는 익은데. 찾아보니 뭔가를 만드는 직공이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어내고야 만 것도 다 성명학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카트라이트는 수레를 만드는 사람! 왠지 서부극에 어울리는 것 같다. 아, 서부극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리 쿠퍼의 쿠퍼는 ‘통 만드는 이’다. Cooper. 배불뚝이 나무통. 음, 존 웨인에 비교되게 늘씬한 그이의 성이라니 그건 쫌, 아니 많이 깬다.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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