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던 때에는 멀지도 않은데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묘역이 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그곳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옛날 한국에 파견되었던 영국인 기자가 그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37세에 죽은 언스트 베델(Ernest Bethell, 1872-1909). 그는 어떠한 신념 (혹은 사랑)으로 한국에서 살다 한국에 뼈를 묻었을까?
베델은 16세에 무역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서 일본 고베로 건너가 산다. 그러다 1904년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이 되어 한국에서 러일전쟁을 취재하게 된다.
영국은 당시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입장은 일본에 유리한 보도를 하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 와서 일본의 실상을 보고 크게 분개한다. 그래서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해 진실을 알리는데 발벗고 나선다. (이는 그가 영국인으로서 치외법권이 있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한국땅 황무지 개발권에 반대하고, 을사늑약이 부당하다 외치며 우리의 자주권을 지지했다. 일제가 이를 두고 가만 있었겠는가. 그는 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6개월 근신과 3주의 금고형과 함께 상해로 추방된다.
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신문사는 기울고 일본의 감시와 모함은 계속되었다. 그는 결국 1909년 3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양화진에 묻힌 그의 유언은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오래오래 살아남아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순되게도,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다음 날부터 ‘대한’자가 빠진 ‘매일신보’가 되어 조선총독부의 일간지가 된다. 베델이 살아있었다면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이다. 죽음을 불사했던 자신의 희생과 신념을 조롱한 처사가 아닌가.
1910년 장지연의 글을 새겨 베델을 추모하는 비석이 섰지만, 일제는 비문을 칼로 파내어 파괴한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난 1964년 언론인들이 모여 작은 비석을 그 옆에 다시 세운다. 그의 비석은 현재 두 개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거기 보이는 모든 이들이 다 애잔하다. 젊디 젊은 베델과 갓을 쓴 양기탁. (양기탁은 피죽도 제대로 못 먹은 사람처럼 말랐다.) 편집국에서 일하는 지난한 조선의 백성들. 베델의 장례 행렬에는 그런 조선의 백성들이 끝이 안 보이게 뒤를 따르고 있다.
이곳에 안장된 400여 명의 외국 선교사들은 모두 신념 하나 붙들고 한국에 와서 뼈를 묻었다. 그들은 주로 교육과 의료 사역으로 우리들의 오늘을 만들었다.
기자가 기레기로 불린 지도 오래다. 신념의 시대는 갔다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타인을 위해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
한영국/소설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