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가족들은 부모님 댁에 모였다. 현관 한 켠에는 아버지 글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 이사를 했을 때, 새 보금자리에 대한 기쁨과 기대를 담은 것 같았다. 그 글씨를 보자, 물먹은 종잇장이 된 마음에서 다시 물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현업에서 은퇴할 무렵 서예를 시작했다. 가끔 대회에 출품해 수상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좋은 글씨는 표구하여 자식들에게 나눠줬지만, 한자를 잘 모르던 나는 그저 ‘그림 같은 글씨’로 여겼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된 지금에는 뜻을 모르는 글도 사진만 찍으면 그 뜻과 유래를 척척 알려준다.
장례식장에 온 이들은 조문을 하고,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 뒤, 제 주변의 건강을 걱정하며 떠난다. 정작 그날의 말없는 주인공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 힘들다. 고인의 약력이나 살아온 발 자취 같은 것이 짧게나마 게시되어 있으면 좋겠다. 생전 모습이나 주변 분들의 회고를 영상으로 남기는 것도 구체적 추모의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죽음은 예고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다. 준비할 시간을 넉넉하게 허락하지도 않는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이 늦게나마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아버지는 1940년생이었다. 수탈이 극심했던 일제강점기에 시골에서 태어나 전쟁의 참화와 가난을 견디며 자랐다. 사춘기가 되어,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자 집을 떠나 상경했다. 4.19혁명 때에는, 남대문에 올라 교복 입은 학생들의 장엄한 행렬을 바라보며, ‘배운 사람들은 저렇게 당당하게 싸우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군 입대 후, 왜소한 몸에 아무 배경도 없는 육군 이병은, 먼저 입대한 또다른 배경 없는 자들로부터 쏟아지는 폭력을 그저 견뎠다. 아버지는 늘 참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훈련 중 사고로 두 차례 큰 수술을 받고 군 병원에 입원해서야 비로소 ‘참는 일’에서 해방됐다. 그리고 전혀 다른 계급의 온화하고 특별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군의관들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삼형제를 보면서 가끔 ‘군대는 꼭 장교로 가고, 사관학교를 가기 싫다면 의대도 좋다’는 말씀을 했다. 국가에 대한 봉사나 인류에 대한 희생 같은 숭고한 이유가 아니었다. 입신양명 같은 현실적인 이유도 아니었다. 단지, 사람 대접을 받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두 형들은 아버지 뜻과 다른 진로를 택했고, 막내인 나는 특별한 기대가 없었지만, 재수를 거쳐 의대에 진학하고, 전문의가 되어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다. 휴가를 나올 때도 장교 정복을 입고 오길 바랐다.
요즘은 담담한 가족 서사가 담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옛 영화들을 찾아보고 있다. 1942년작 <아버지가 있었다>에는 나의 아버지처럼 선량한 아버지가 나온다. 자기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아들에게, 그 아버지는 채근담의 한 구절을 들려준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갈고 닦은 끝에 얻은 행복이 오래 간다.” 나의 아버지도 언젠가 이런 말씀을 했다. “앞만 보느라 고달플 때는, 뒤를 돌아봐서 벌써 이뤄놓은 것을 보며 용기와 희망을 가져라.”
아버지의 글씨마다 적힌 호는 楠齊(남제)였다. 이번에 찾아보니 ‘향기로운 나무처럼 가지런하게’라는 뜻이다. 바라시던 대로, 이제는 평안한 곳에서 고요한 나무처럼 오래 행복하게 지내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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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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