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거리는 오랫동안 자동차가 차지해 왔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 흐름의 곁길로 밀려나야 했다. 길 위에서의 주인은 언제나 자동차였고, 인간은 단지 보조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늘 묻지 않을 수 없다. ‘거리는 누구의 것인가’?
LA에 처음 발을 디뎌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코리아타운 6가였다. 그곳은 낯선 듯 낯익은 풍경을 품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미 사라진 영화관 단성사 간판을 단 술집, 오래된 한국 영화의 명장면인 신성일이 죽어가는 경아를 끌어 앉고 있는 ‘별들의 고향’, ‘뽕’, ‘무릎과 무릎 사이’를 간판 그림으로 걸어놓아 잃어버린 시간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풍경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세대의 기억이 교차하는 무대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이민 1세대의 고단한 눈물이 배어 있고, 2세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이도시에 속하는가’? 아니면 ‘이도시의 이방인인가’?
잘 알려진 영화 ‘K-Town Cowboys’은 코리아타운이 단순한 이민자의 주거지가 아니라, 일종의 중간 지대라고 묘사한다. 미국 사회 속 소수자로서의 고립과 한국식 전통의 무게 사이에서 흔들리는 2세대의 이야기와 여전히 생존의 언어로 하루를 버티는 1세 대의 이야기를 해학스럽게 담고 있다. 그 속에서 거리와 술집, 노래방과 클럽은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자기만의 광장, 곧 공동체를 확인하고 소속감을 회복하는 의식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자유는 언제나 불안을 동반한다. 경계 위에 선 존재의 고독,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곧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맞닿는다. 장소 없는 정체성은 허공에 부유하고, 정체성 없는 장소는 공허하다. 이민자의 삶은 바로 이 두 축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실존적 고뇌를 품고 있다.
이제 그 한복판에서 새로운 실험이 시도되고 있다. 코리아타운 6가의 일부 구간을 자동차에서 사람에게 돌려주자는 보행자 전용 거리 조성 계획이다. 하지만 서울의 전통거리 인사동이나, 쇼핑거리 명동, 젊음이 넘치는 축제의 거리 신촌과는 그 목적이 다르다.
6가의 실험은 자동차 대신 발걸음, 소음 대신 대화, 속도 대신 머묾을 중심에 두려는 작은 혁명이다. 6가에서 단지 밥먹고 차마시는 만남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관계 맺는 방식의 변화를 추구한다. 벤치와 나무, 그늘과 테이블이 설치된 6가에 언어가 달라도 웃음이 닮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단절된 기억들이 이어지고, 흩어진 관계가 다시 얽히는 자리. 그것은 단순한 교통 정책이 아니라 공공 공간은 누구의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물론 갈등은 있다. 서비스 물류 공급과 배달의 지연, 주차장 확보와 관리 비용, 일부 상인의 매출 감소와 “젠트리피케이션” 우려가 그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언제나 갈등을 품는 장소이다. 중요한 것은 그 갈등을 넘어서는 합의, 곧 사람 중심의 거리라는 새로운 가치에 대한 공감이다.
걷고 싶은 거리의 원리를 제시한 도시계획가 제프 스펙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좋은 보행거리는 단순히 안전하고 편리한 이동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목적지와의 연결, 물리적·심리적 쾌적성, 걸을 때 느끼는 즐거움과 볼거리, 그리고 교통 사고 위험으로부터의 해방이 어우러질 때 완성된다.
길은 단순한 선형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숨결이 스며드는 삶의 무대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우연히 마주치고, 함께 머물며, 관계를 맺게 된다. 인근 식당의 음식 냄새가 배어나오고, 한 구석에서는 시낭송회가 열리며, 버스킹 공연을 지나가던 행인이 발길을 멈추며 즐겁게 바라보고, 벤치 위 대화가 작은 유대로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도시는 다시 살아 있는 거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코리아타운 6가의 작은 실험은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도시는 속도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머묾을 위해 존재하는가?
자동차에서 발걸음으로, 효율에서 공공성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일은 도시를 다시 인간의 얼굴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길 위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라는 것을 말이다. 발걸음마다 관계가 이어지고, 머묾마다 기억이 쌓인다. 코리아타운 6가에서 시작된 이 작은 실험은, 21세기 세계 도시 LA가 어떻게 다시 사람을 중심에 두는 시도를 할 것인지 물을 수 있는 중요한 예고편이다.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속도의 도시인가? 머묾의 도시인가?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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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성 21세기 글로벌 도시전략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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