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계덩어리』는 전쟁 소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비추는 거울이자,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다. 도덕과 신앙, 계급이라는 허울은 위기의 순간 얼마나 쉽게 벗겨지는가. 이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속수무책으로 패했다. 노르망디의 도시 루앙은 낯선 군복의 발자국으로 가득 메워졌고, 거리에는 두려움과 굴욕이 드리워졌다. 그 비극의 뿌리에는 유럽의 패권을 두고 벌어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충돌이 있었다. 보불전쟁(普佛戰爭, 1870~1871)은 독일 통일을 완성하려는 프로이센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가 맞붙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세당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고, 파리는 포위 끝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잃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이 탄생했다.
이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기 드 모파상(1850~1893)은 단편 『비계덩어리』를 발표했다. 작품은 한 마차에 오른 열 명의 프랑스인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드러낸다. 귀족 부부는 체면을, 상인들은 이익을, 수녀들은 신앙을, 반정부 인사는 신념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프로이센 군이 점령한 루앙을 빠져나와, 아직 적의 발길이 닿지 않은 비점령지로 피신하고 있었다. 새벽녘, 눈발이 낮게 흩날리며 들판을 덮었고, 얼어붙은 길 위에서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창문 밖으로는 불탄 마을의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고, 멀리 교회의 첨탑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 마차 안에는 냉기와 침묵이 감돌았고,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각자 다른 이유로 떠나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한 가지 공통된 마음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그들 곁에는 매춘부 엘리자베트 루세, 곧 ‘비계덩어리’라 불린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살찐 몸은 조롱의 대상이었고, 직업은 멸시의 이유였다. 그러나 전쟁의 배고픔은 계급을 가리지 않았다. 추위와 허기 앞에서 오직 그녀만이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었고, 마차 안은 잠시나마 따뜻해졌다.
그러나 여정은 곧 시험대에 올랐다. 시골 여관에서 프로이센 장교가 조건을 내걸었다. “그 여인이 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들은 떠날 수 없다.” 처음에 사람들은 분개하며 도덕과 애국심을 말했으나, 불편과 두려움은 그들의 양심을 서서히 잠식했다. 설득과 압박 끝에 엘리자베트는 결국 눈물을 삼키고 장교의 방으로 향했고, 길은 열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존엄이 꺾인 대가였다.
더 잔혹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모두는 태연히 자리를 잡았고, 감사의 말도 따뜻한 눈길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손길을 피하고 음식을 거부했다. 가장 고귀한 희생이 가장 차가운 외면으로 돌아오는 순간, 인간의 위선과 침묵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모파상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작품 속 인물들은 특정 시대의 프랑스인이지만, 그 모습은 오늘 우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기 앞에서 원칙보다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누군가의 희생 덕분에 길이 열리면서도 정작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는 모습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마차 안의 침묵과 외면은 우리 사회의 그늘을 비추지만, 동시에 우리가 다시금 어떤 얼굴로 서로를 마주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비계덩어리』는 단순한 시대극이 아니다. 인간은 위기의 순간 얼마나 쉽게 허울을 벗어던지고, 또 얼마나 무심하게 누군가의 희생을 외면하는가. 오늘날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정작 그 고통 앞에서는 눈을 돌리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모파상의 경고는 한 세기를 초월해 지금까지도 우리를 정직한 거울 앞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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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이 워싱턴문인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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