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톨 같은 친구가 있었다. 둘 다 책을 좋아해 짝꿍으로 어린 날들을 보내면서 함께 꿈을 꾸었다. 그 친구가 시카고 근교 에반스톤에 있는 대학에 와 있을 때는 그 꿈을 구체화시켜보려 애썼다.
우리는 밴을 하나 장만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농촌이나 산골 마을을 돌며 책을 빌려주고 싶었다. 특히 어린이 책을.
시카고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둘 다 결혼을 하고 애들이 딸린 시점이었다. 친구는 내게 제 남편의 박사학위 논문집을 가져다주었다.
친구 남편은 친구를 흔쾌히 미국 대학에 보내면서 자신이 아이를 돌봤다. 반면에 내 남편은 레지던트를 겨우 시작한데다 우리는 식구도 많아 어려운 시기였다. 불법체류하는 시부모도 모셔야 했다.
친구와 시내에서 약속이 있던 날, 남편은 시부모를 모시는 여자가 다니는 게 마땅찮다며 나를 차에서 내려주지 않고 거리를 빙빙 돌았다. 결국 내가 차가 서행하는 사이 문을 연 후에야 실랑이는 끝났다.
나는 친구에게 내 처지를 얘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짐짓 꿈만 꾼 셈이 됐고. 친구는 그 모든 계획이 꿈이 아니고 실현 가능한 현실이었다.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 나는 여러 번 이사 다니면서도 교수가 된 친구 남편의 논문집을 소중히 간직했다. 친구는 돌아가 대학에 남았고, 나는 내 처지 때문에 자주 연락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 내 여건이 허락되면 직장으로 연락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어느 날 갑자기 친구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학교 웹에도 이름이 없었다. 워낙 드문드문 연락을 하던 처지라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한국에 가면 자연히 이래저래 알게 되려니 했다.
올 봄, 나는 친구의 소식을 알아볼 생각으로 한국에 갔다. 동창회에 가서 다른 친구를 만나 물었다. 그녀의 말인즉, 친구가 10년 전에 죽었다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산악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로.
종일 울었다. 여행하면서도 비질비질 눈물이 났다. 한국은 이제 너무도 잘 살아서 우리의 꿈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친구에게 새우 콩꼬투리 볶음을 다시 먹여주고 싶었는데…. 친구가 시카고 우리 집에 와서 맛있게 먹고 레시피까지 물어갔던 그것.
친구 남편은 올해 친구의 10주기를 맞아 책을 냈다. 사진도 실려 있어서 여전한 친구 모습도 볼 수 있다.
이제는 은퇴하고 자신도 투병 중인 친구 남편이 책에다 썼다. ‘아내의 죽음은 단지 그가 나를 떠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속에 있던 나도 함께 떠나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은 잃어버린 나의 일기장이고, 사라져버린 나의 연애편지이며, 이젠 되찾을 수 없는 나의 은밀한 고백록이 아니던가. 아내의 죽음과 함께 아내가 간직했던 내 기억과 정담과 참회마저도 함께 떠나갔으니 말이다.’
맞다. 친구는 내가 왜 시카고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꿈을 향해 달려가지 못하며 미안해 했는지 대강 짐작했을 것이다. 밴을 사자며 신나 했던 약속도 우리 둘에게만 중요한 계획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고, 들을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들. 그가 사라지자 그 모든 것이 내게서도 다 빠져나갔다. 친구와 함께 나의 일부도 죽었다.
이사를 다니면서 어느새 나는 친구가 오래전 주고 간 논문집을 잃어버렸다. 하긴 논문을 쓴 당사자도 은퇴를 했으니 이제 의미가 없는 책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사람이든 물질이든, 때가 되면 다 의미가 스러진다.
결국 놓아주고, 놓아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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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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