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피땀 위에 선 미국
코네티컷에 본부를 둔 에트나와 하트포드 쿠런트사가 최근 노예를 착취한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한 것은 뒤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한 일이다. 이들 두 회사는 노예 보험을 들어 주고 매매광고업을 해 돈을 벌었다. 노예 덕을 본 것은 남부만이 아니다. 북부 노예 매매와 노동 착취도 뿌리가 깊다.
노예를 팔아 부흥한 대표적인 도시가 뉴욕이다. 1600년대 이후 뉴욕을 건설한 것은 노예들이었다. 1750년에는 노예가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했다. 뉴욕 상인들의 대부분은 1850년대까지 노예제를 지지했다. 노예가 기른 면화에 의지해야 했던 북부의 공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줄리아니 뉴욕시장이 사과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뉴욕의 역사를 가르칠 때 시와 노예제와의 밀접한 관계를 밝혀야 하며 상설 전시관도 마련해야 한다.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1860년 가치로 미국내 노예의 총 시가는 30억달러였다. 이는 미국내 모든 공장과 철도, 은행을 합친 것 보다 많은 수치다. 링컨은 두 번째 취임 연설에서 미국의 번영은 250년간 흑인의 무보수 노동에 힘입은바 크다고 말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최소한의 의무다.
(에릭 포너, 뉴욕타임스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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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참전 용사 모욕말라
클린턴 대통령은 월남전 참전전몰 용사비 옆에 참전했다 제대후 고엽제나 전쟁 후유증으로 사망한 미군 기념판을 세우는 법안에 서명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전쟁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이 전쟁하다 죽은 사람만큼 많은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 기념패를 전몰 기념비 옆에 세우는 것은 전사자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월남전 참전 용사가 피해자란 주장은 60년대 반전 운동가들이 퍼뜨린 것이다. 참전용사들은 정부에 의해 불의한 전쟁으로 내몰렸고 군부에 의해 살인자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전쟁에 나간 사람은 대부분 젊고 가난한 소수계로 월남에서 만행을 저질렀으며 돌아와서는 후유증으로 마약과 범죄에 빠진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르다. 전몰 군인의 30%는 저소득층 출신이었지만 26%는 상류층 자제였다. 사망자중 백인이 86%, 흑인이 12.5%였다. 미국내 흑인 인구 비율은 13.1%다.
330만 참전 용사의 절반이 후유증으로 고생했다는 이들의 주장도 믿기 힘들다. 버킷은 98년 출간한 ‘훔친 용기’라는 책에서 자신이 월남전 때문에 폐인이 됐다고 주장한 사람중 상당수는 월남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사실을 밝혀냈다. 재향군인부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참전 미국인의 91%가 자신의 복무에 긍지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실상을 왜곡하는 일은 그만 해야 한다.
(매커빈 오웬스, 월스트릿저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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