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씨는 얼마 전 얼굴도 모르는 서울의 대학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L씨가 70년대에 졸업한 여자대학을 90년대에 졸업했다고 하니 후배라기보다 자식 나이에 가까울 이 여성은 "서울의 모 은행에서 일하다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공부도 할 겸 미국행을 하게 됐다"며 일자리와 숙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L씨는 생면부지의 처지에 너무나 당당하게 요구사항을 밝히는 후배에게서 거부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님만 믿는다"는 한마디에 미처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L씨가 바쁜 시간을 할애해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알아본 뒤 "하숙은 500달러선, 영주권이 없으면 이곳 은행에 취직하기는 어렵다"고 결과를 알려주자 "하숙은 350달러선에 가능하고 영주권이 없어도 얼마든지 취직할 수 있다던데…"라고 토를 다는 바람에 기분이 상했다.
P씨 역시 서울서 온 대학 후배를 도와줬다가 섭섭했던 기억이 있다. 여러 해 차이가 나서 얼굴도 가물가물한 후배가 어느 날 불쑥 전화를 걸어와 "UC샌디에고로 유학을 가게 됐는데 무게 나가는 짐을 미리 선편으로 부쳤으니 창고에 가서 찾아다가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P씨는 후배가 사전에 상의 없이 짐부터 부쳤다는 점이 불쾌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이민 초년기 고생이 생각나 꾹 참고 도와주기로 했다. 직장에서 반나절 짬을 내 롱비치에 있는 창고에 가서 보관료에 하역료 등 적지 않은 돈을 물고 짐을 찾아 놓은 후 얼마 뒤 도착한 후배를 공항에서 픽업해 집에서 며칠 재운 뒤 샌디에고까지 데려다 주었다. 몇달 뒤 숙소를 옮기게 됐다며 도와 달라고 하는 등 그 뒤에도 툭하면 P씨에게 지원요청을 하던 후배는 학업을 마치고 자리를 잡은 뒤로는 일체 소식을 끊었다.
사업가 K씨의 집은 규모도 크고 살림도 제법 넉넉해서 서울에서 오는 동창들의 단골 민박집이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처지에 해마다 여름방학이 오면 가족과 함께 놀러와 1~2주씩 묵고 가는 동창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얼마전 10년 만에 한국 나들이를 하게 된 K씨가 자기 집에서 묵고 간 동창들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단 한 명도 만날 수가 없었다. K씨는 "무슨 대접을 바랐던 것이 아니요 평소 신세를 지고 갈 때 ‘한국에 나오면 꼭 연락을 하라’고 신신당부들을 했던 터라 행여 한국에 나왔다가 연락도 안 했다고 섭섭해할까 싶어 연락을 취했던 것인데 모두들 귀찮아하는 빛이 역력하더라"고 했다.
K씨는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어떻게 하지"라는 변명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너는 하필 이렇게 바쁠 때 나왔냐"고 짜증을 내는 데는 그만 비위가 틀려 "그래 바쁜데 연락해서 미안하다"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고 했다. "자기네 시간은 중요하고 LA 사람 시간은 얼마든지 빼앗아도 무방하다는 서울 사람들의 발상이 못내 섭섭하더라"는 것이다.
LA 살고 있는 죄로 올 여름 염치없는 서울 손님들 얼마나 더 감내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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