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허진호
출연 : 이영애, 유지태, 백성희, 박인환
분류 : 드라마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일 : 2001.09.28
"라면 먹을래요?" 이렇게 남자를 불러들인 여자는 냄비에 스프를 막 뜯어 넣고 나서 남자에게 말한다. "자고 갈래요?" 남자는 여자와 ‘진짜’ 자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는 "좀 더 친해지면 해요." 언제나 여자는 자기 식이다,
앞으로 여자는 또 그럴 것이다. 자기 식대로 사랑하고, 자기 식대로 떠나고.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을 것이다. 그녀에겐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냥’ 사랑에 빠지듯, ‘그냥’ 헤어지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니?”라고 물었던 남자가 "변하니까 사랑”이라고 깨닫게 되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다. 속절없는 봄날이 그래서 아름다운 것처럼.
데뷔작이 은퇴작인 감독이 있는가 하면,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감독이 있다.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로 데뷔한 허진호 감독이 그렇다. 그의 데뷔작은 ‘일상에 천착한 멜로’라는 새로운 영화작법을 유행시켰다.
’봄날은 간다’는 크레딧을 보지 않아도 감독의 이름을 맞출 수 있을 만큼 ‘허진호적’이다. 감독의 말투처럼 큰 파동이 없는 줄거리, 치매에 걸린 할머니(백성희)와 혼자 컵라면을 먹으며 속앓이를 하는 아들에게 소주 한 병을 슬쩍 건네 주는 아버지(박인환) 등 온기가 느껴지는 가족, 그리고 슬픔. 지방 방송사의 아나운서 겸 PD인 은수(이영애)와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소리 채집 여행을 갔다가 사랑에 빠진다. 이혼의 경험이 있는 은수는 "사귀는 사람 있으면 데려 오라"는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상우가 부담스러웠다. "우리 그만 만나자" "내가 잘 할게요" 두 사람의 대화가 겉돈다. 은수와 상우의 갈등은 연상의 이혼녀와 연하의 총각이라는 ‘스캔들성’ 사실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감독은 그렇게 보이게끔 영화를 만들었다.
’소리’는 물체에 닿는 음파의 진동. 그 미세한 움직임을 녹음기에 담는 상우에게 ‘사랑’ 역시 그렇게 채집이 가능한 것이었다. 모든 시간, 모든 공간의 소리가 다르듯, 그녀와의 사랑은 ‘유일한’ 그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를 밀쳐냈다 잡아당기기를 반복한다. 여자는 욕망과 사랑으로 구성된 자기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감정의 유희를 지속한다. ‘오 수정’의 수정처럼 은수는 끊임없이 남자를 애태우고 시험하지만 허진호 감독은 홍상수 감독처럼 드러내놓고 잔인하지는 못하다. 대신 그는 은수의 감정적 기복을 낮은 파동으로 드러내며, 이 파동을 감지하는 상우의 정신적 성숙 혹은 노화로 자연스런 결말을 유도한다.
"우리 같이 살까?" 또 다시 봄이 되어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은수에게 그는 대답 대신 그녀가 선물로 준 화분을 다시 건네준다. 비로소 그는 알게 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생의 마지막 날에 ‘봄날은 간다’를 불렀던 그 마음을. 갈대밭에 선 그에게 들리는 소리가 갈대 같기도, 바닷소리 같기도, 바람 소리 같기도 한 그 까닭을.
’맞춤’ 배우처럼 보이는 유지태와 이영애는 여태껏 한연기 중 최고라는 평을 들을 것 같다. 28일 개봉.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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