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1일 이후 우리는 일종의 정서적 순화작용을 거쳤다. 삶의 어느 시기부터인가 돌처럼 굳어져서, 기쁨도 슬픔도 흔적을 남기지 못하던 우리 마음속 감정의 밭을 ‘테러’는 가공할 충격으로 시원스럽게 뒤집어 놓았다. 딱딱하고 메말랐던 흙이 부드럽고 촉촉하게 바뀐, 그래서 여려진 감정의 밭을 통해 우리는 남의 상실과 아픔, 기쁨과 안도를 내 일처럼 가슴으로 빨아들이는 감동을 경험할수 있었다.
매스컴을 통해 소개된 수많은 사연과 말들이 한바탕의 거대한 밀물로 몰려왔다 밀려나간 지금 내게는 잊혀지지 않는 한마디 말이 있다.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질 때 바로 그 빌딩 안에 있다가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한 40대 남성이 한 말이었다. 재와 먼지를 뒤집어 쓴채 죽을힘을 다해 달려서 위험한 현장을 빠져나와 정신을 차려보니 모르는 사람들이 물을 주며 자신을 보살펴 주더라고 했다.
그런데 그 작은 친절의 행위에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무엇이 그런 힘을 만들어 냈을까. 물을 건네주는 행위 자체가 힘의 근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에서 빠져나온 한 생명을 돕고 싶은 마음, 그 도움을 받는 마음이 모두 이해와 계산의 여과장치 없이 완전히 열려서, 마침내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 가능해져 그런 신비로운 힘은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테러사건 이후 여러 독자들, 주변 친지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공통적인 경험은 ‘죽음’‘상실’‘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으로 집약이 되었다.
“나도 죽을 수 있다”“아내/남편, 자녀, 부모가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다”“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숙연해지고 사는게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아득히 멀리 있을 것으로만 알았던 ‘끝’이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인생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지는 경험들을 하고 있다.
인디언 부족 중 체로키족은 사람의 마음에 대해 재미있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육신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마음과 영적인 마음의 두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마음은 식욕, 성욕등 기본적인 욕구와 의식주등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 마음인데, 이 마음이 너무 커지면 사람이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탐욕스럽고 공격적이 된다고 한다. 반면 영적인 마음은 눈이 밖으로 열려서 사랑과 이해로 타자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문제는 마음의 크기가 일정해서 한 마음이 너무 커지면 다른 마음은 작아질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영적인 마음, 즉 영혼이 차지할 자리는 그만큼 줄어들고 만다.
테러 참사현장을 진두지휘하면서 탁월한 지도력으로 스타가 된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시민들이 이제 ‘테러’를 뒤로하고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시를 돕는 일이란 충고를 했다. 테러의 충격에서 벗어나 정상적으로 일하고, 샤핑하고, 여행도 하며, 웃고, 떠들고, 파티하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라는 권고였다.
그것은 우선 정신건강을 위해서 필요하고, 항공사들의 대규모 감원, 폭락한 주식시장, 썰렁해진 샤핑몰등 테러당한 경제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제 우리가 돌아갈 일상이 반드시 이전의 일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비상사태가 되면서 군인들 사이에서는 결혼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면서 토닥토닥 싸우던 부부, 만나면 얼굴을 붉히던 부모와 자녀가 요즘은 사이가 좋아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 결과라고 생각된다.
체로키족의 이해를 빌려온다면 우선 필요한 것은 마음의 구획정리이다. 육신의 삶을 위한 마음만 가득차서 한구석에 조그맣게 쪼그라든 것이 대부분 우리의 영적인 마음상태이다. 그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 영혼이 크고 깊어진다면 뉴욕 테러현장의 남자가 느꼈던 ‘신비로운 힘’을 우리도 일상에서 경험할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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