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케르 부진 계기로 확인된 월드컵의 또다른 징크스
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순도높은 6골을 터뜨리며 신생 크로아티아에 첫출전 3위돌풍을 안겨준 다보르 수케르(34). 그러나 3일 크로아티아-멕시코전에서 수케르는 없었다. 4년전 위력은커녕 한차례 빗나간 슈팅과 두어차례 백패스 말고는 거의 볼을 잡아보지도 못하다 후반전에 교체돼 벤치로 물러났다. 약세로 분류됐던 멕시코는 머릿수만 채운 꼴인 수케르의 빈틈을 잘 공략, 1대0 승리를 거뒀고. 그렇다고 그의 부진이 별난 건 아니다. 역대 득점왕들의 다음 대회 부진은 월드컵의 또다른 전통이다.
4년뒤까지 득점왕의 위신을 그런대로 지킨 선수라야 월드컵 72년사에 고작 서너명. 초대 득점왕(30년) 기예르모 스타빌레(8골,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유니폼을 입고 뛴 34년 에도 나름대로 분전하며 이탈리아우승의 도우미역할을 했다. 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득점왕 게르트 뮐러(10골, 당시 서독·현 독일)는 74년 서독월드컵에서 네덜란드와의 결승전 결승골 등 4골을 더 보태 아직껏 월드컵 토탈득점왕(14골)으로 ‘재위’하고 있다. 이밖에 86년 최고골잡이 게리 리네커(6골,잉글랜드)가 90년 이탈리아대회에서 잉글랜드의 4강진출을 이끈 점이 눈에 띌 정도다.
득점왕 수난시대 선구자는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오. 66년 잉글랜드월드컵 8강전 북한과의 경기에서 경기중반에 투입돼 4골을 몰아넣으며 눈깜짝할 사이에 0대3 패배를 5대3 승리로 뒤바꿔놓는 등 9득점을 올린 그는 포르투갈의 지역예선 탈락으로 70년 대회엔 얼굴조차 내밀지 못했다. 74년 득점왕 구제고시 라토(폴란드·7골) 역시 78년 대회에선 초장부터 집중마크의 제물이 돼 상대문전에 접근조차 버거웠고 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에서 ‘6골=득점왕’ 등식을 처음 세운 마리오 캠페스(아르헨티나)는 4년뒤엔 국가대표에도 뽑히지 못했다. 82년 스페인대회 최고골사냥꾼 파올로 로시 역시 86년에는 멕시코행 비행기에도 오르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90년 대회에서 후보로 뛰면서도 ‘6골의 제왕’에 오른 스킬라치(이탈리아)는 94년 미국월드컵행 엔트리에서 빠진 뒤 정처를 찾아 신생 일본프로리그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94년 미국대회의 득점왕은 2명 흐리스토 스토이코비치(불가리아)와 알렉 살렌코(러시아). 6골의 한계는 미국땅에서도 불변. 진정한 왕중왕은 스토이코비치였다. 그는 고비마다 한점한점 터뜨리며 불가리아 4강신화의 일등공신이었던 반면 2라운드 진출에 실패한 러시아의 살렌코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전의를 상실한 카메룬을 상대로 5골이나 몰아쳐 부가가치면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어쨌든 스토이코비치는 98년 프랑스에서 예전의 날카로운 파괴력은 온데간데 없이 뚱뚱한 몸으로 운동장을 어슬렁거리며 신경질만 잔뜩 늘어난 모습을 보여 그를 아끼는 지구촌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불가리아의 1라운드 탈락과 함께 조기 귀국(현재 MLS 시카고 파이어 소속) 살렌코는 러시아의 지역예선 탈락으로 프랑스잔디를 밟아보지 못한 채 끝내 옷을 벗었다. 올 여름엔 누가 득점왕에 오르고 4년뒤엔 어떻게 될까.
<부산-정태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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