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칼럼 (세상사는 이야기)
▶ 새라 최 <피아니스트>
에밀리는 내가 엘에이로 이사온 후 처음 맡게 된 학생이다. 그 때, 에밀리는 만 네살 11개월이었고, 바로 그 해 9월에 다섯살이 되었다.
에밀리는 책을 읽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이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동네 도서관에 가서 한 아름씩 책을 빌려와서는 읽고, 주위사람들에게 그 내용과 거기에 대한 자기 생각을 얘기하고는 했는데 워낙에 마음씨가 곱고 따뜻한 아이이기도 했지만, 사고의 깊이나 느끼는 감정의 폭이 굉장히 어른스러워서 나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하며 즐겁게 해 주었던 학생이었다.
연습을 정성 들여 집중해서 꼼꼼하게 하는 편이 아니라 진도가 빨리 나가지는 못했지만, 일단 손에 익은 곡은 그 완성도가 무척 높은 것이어서 마치 내 또래가 치는 곡을 듣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하기도 했다.
그 아이를 가르치던 첫 해에 있었던 일이다. 아직 알레그로(Allegro)니 안단테(Andante)니 하는 템포 마크(tempo mark)를 배우지 않았을 때라, 에밀리가 치는 곡에는 대부분 영어로, Fast, Slow, Moderately Slow, 등등의 템포가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떤 곡에 ‘Gaily’ 도 아닌, 그냥 ‘Gay’ 라고 써 놓은 템포 마크가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크리스마스 캐롤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기억된다.
항상 새로운 곡을 대할 때마다, 음표를 읽기 전에 먼저 템포, 박자, 조표, 제목 등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한 후에 악보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때도, "흠.. 이 곡은 템포가 ‘Gay’라고 되어 있네. 그러면 에밀리, 이 곡은 어느 정도나 빠르게 쳐야 하는 걸까?" 하고 물었더니, 이 만 다섯살 먹은 아이가 갑자기 깔깔 웃으면서, "새라, 어떻게 Gay가 템포가 될 수 있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야? 우리 전에도 Happily, Sadly 이런 템포를 본적 있잖아. Gay는 Happy와 비슷한 말이니까, 생각해봐. 빠른 쪽이 어울릴까, 아니면 느린 쪽이 어울릴까?" "Gay가 Happy와 비슷한 말이라는 건 틀려요. 아무도 그렇게 쓰지 않는 걸요." "어째서? 당연히 Gay는 형용사로써 Happy와 비슷한 말이지." "새라, 바보같이 그것도 몰라요? 난 어제 저녁에도 시트콤 ‘로젠’을 봤는데, 거기서 로젠이 친구가 게이라 게이바에 가는 내용이 나왔어요. 그 바가 절대로 happy bar가 아니었어요."
’흠, 난처하군. 얘랑 이런 얘기를 해야 하다니…’
그리고 되물었다.
"그럼, 그 게이바라는 낱말에서의 게이가 뭔지 넌 아니?" "물론이죠. 그건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걸 말해요. 우리 반에도 어떤 애가 아빠가 둘 이예요. 엄마는 없구. 걔 이름은 대니인데, 대니의 아빠는 둘 다 게이에요."
순간 그런 말을 에밀리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에 대해 당황스러웠다.
"그래? 대니가 안 됐구나, 엄마가 없다니." "아니에요. 대니는 행운이죠. 아빠가 둘이나 있으니까."(참고로, 에밀리는 아빠와 무척 사이가 좋을 뿐더러, 에밀리의 아빠는 내가 남편감으로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인, 아주 멋있고, 다정다감하고, 따뜻하고, 가정적이고… 하여간 훌륭한 아빠이다.)
"그렇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도 게이란 말이 그럴 때 사용된다는 건 알지만, 이 곡은 아주 옛날에 작곡된 곡이고, 작곡자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기분으로’ 이 곡을 치라고 이 템포를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내 생각엔 ‘즐거운’이라는 뜻으로 이 말이 쓰인 것 같은데. 이 곡은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편곡되어 있는데,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기분’이라면 너처럼 아주 어른스러운 아이조차도 그 곡의 템포를 정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내가 한번 쳐 볼께. 들어보면 알겠지만, Gay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즐거운 곡이야. 자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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