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서머셋 모옴, 어네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지드, 톨스토이, 토스토예프스키 등의 작가 이름과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장편이나 단편소설의 제목을 즐겨 부르고 소설을 읽고는 독후감 발표회도 가졌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 되면서 이들의 이름과 작품과 그 속에 담긴 삶의 철학을 잊어버려간다. 억지변명을 한다면 소설 속보다는 자신의 삶이 더욱 소설적이라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할까.그러다 오랜만에 청소년기에 자신이 좋아했던 소설가나 화가의 이름이 눈에 띄면 상당히 반가워진다.
현재 메트 뮤지엄에서 하고있는 폴 고갱의 ‘이국의 매혹’ 뉴욕전도 그렇다. 이 고갱전은 학창시절 읽었던 서머셋 모옴의 장편 <달과 6펜스>를 떠올리게 했다.
지하전시장 입구에 걸린 세계지도는 고갱이 살던 파리와 남태평양의 타히티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를 일단 먼저 보여준다. 원래 메트에는 고갱의 그림이 별로 소장되어 있지 않은데 이번 전시회에는 현대뮤지엄과 구겐하임 뮤지엄, 개인 소장품 등 여러 곳에서 대여해 온 회화, 조각, 판화, 수채화 120여점이 고갱의 예술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는 고갱의 콜링 카드와 3명의 타히티 여인 삽화를 그려 넣은 친필 편지, 가죽 커버에 레이스 끈으로 묶게 되어있는 예술가의 포트폴리오도 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펜글씨로 쓰여진 고갱의 필적과 사인은 얼마나 단정하고 야무진 지 작가의 그림처럼 깔끔하다.
웃통을 벗거나 등판을 드러낸 2, 3명의 타히티 여인들은 한결같이 브라운 혹은 초콜릿 피부에 순하디 순한 표정으로 원초적인 건강한 생명력을 나타내고 있다.
학창시절에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물질적인 것을 멀리 하고 정신적인 것을 우선한다. 그러다 보니 <달과 6펜스>에서 주식중개인인 40대 남자가 문명세계를 떠나 처자식도 버린 채 타히티섬으로 이주하여 예술혼을 불태운 삶에 감동했고 주인공의 모델이었던 폴 고갱은 물론 렘브란트, 모딜리아니, 자코메티 같은 화가가 좋았다.
그러나 세상을 어느 정도 산 지금은 마티스나 마네, 모네가 좋다.
고뇌하는 인간의 초상화보다는 온화한 실내에 밝은 햇빛, 꽃이 핀 정원 등 밝게 채색된 풍경화를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넉넉하고 환하며 따뜻한 품에 부드럽게 안겨든 것 같다.
지금의 나 자신은 고갱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예술가도 아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지나 산사로 들어갈 용기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소인이다 보니, 또 내가 돈을 벌어 돈을 써보니 돈이 없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가. 그래서 좋아하던 화가도 달라지는 것인지.
이제는 식탁에 차려놓을 것이라고는 밝은 햇살뿐이지만 사랑만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문학소녀도 아니고 적게 먹더라도 때가 되면 끼니를 거르지 말아야 한다. 살면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안 해야겠고, 좋아하는 뮤지컬과 음악회는 많이 갈수록 좋고 계절이 바뀌면 새 옷 두어 벌은 사 입어야 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비싸지는 않으나 때가 되면 예쁜 선물은 할 수 있는 정도, 이렇게 다분히 속물적인 내가 난 마음에 든다.
이렇게 살고있지만 학창 시절 좋아했던 광기와 예술의 극치를 뜻하는 ‘달’과 재산과 세속적인 명성을 갈망하는 감정을 상징하는 ‘6펜스’를 떠올리게 한 고갱의 전시회를 보고 나오니 맑고 고결한 향을 흠뻑 맡은 기분이다.
물질에 구애받지 않던 그 시절의 감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인지. 순박한 여인의 몸과 영혼을 보며 먼지와 때에 젖은 내 마음이 정화된 것 같았는지. 메트 뮤지엄의 ‘고갱전’은 10월20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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