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말의 이른바 IMF 사태 후 썰물처럼 철수했던 한국의 은행들이 다시 미국시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 예로 우리은행의 현지 자회사 우리 아메리카는 최근 뉴저지의 점포 7개짜리 팬아시아 은행을 인수했다고 며칠 전 발표했다. 외관상 인수가는 장부가의 2.9배 정도이나 내용을 파고들면 줘야 할 돈은 장부가의 3배를 훨씬 웃돈다는 말도 들린다. 지난번에는 미처 일을 도모하기도 전에 소문만 요란하게 퍼졌지만 한국 1위은행 국민도 본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미주시장에 관심이 적지 않은 눈치다.
미국서 감지되는 것은 이 정도이나 한국의 은행들이 새로운 해외영업 기반으로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동남아나 중국 쪽은 이미 진출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같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해외점포 개설 때문에 리베이트 소문에 수수료 덤핑공세까지 꼬리를 물면서 은행끼리 낯붉히는 일도 적지 않다는 소식이다.
5년 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다. 당시 7~8개 정도이던 LA의 한국은행 지점과 현지 사무소는 IMF사태가 터지면서 앞다퉈 점포를 거둬들여 지금은 외환과 우리 등 2개 밖에 남지 않았다. 그 때는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던지 하루라도 빨리 지점 자산을 처분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역적으로 몰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느 은행원의 말대로 “허겁지겁 집(지점장 사택) 팔고, 차(은행 차) 팔고, 은행(채권)도 헐값에 다 떼 넘기고 쫓기듯 물러난 지가 엊그제”인데 상황은 180도 반전하고 있다.
유쾌할 것도 없는 그 때 그 일을 새삼 되새기는 것은 그렇게 돌아갔던 은행들이 컴백 태세를 보이고 있지만 해외영업의 철학이나 경영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의 은행들이 지금도 미주 한인시장을 주력 시장으로 겨냥하고 있다면 과녁 설정부터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팬아시아 은행 인수를 싸고 나라와 경합했던 우리는 자산이 850억달러 가까운 한국 2위의 은행이다. 그런 은행이 자산규모가 겨우 100분의1 정도인 나라와 샅바 끈을 맞잡았으니 보기에 따라서는 한 편의 코미디로 비칠 수도 있다. 한 때 LA진출설에 휘말렸던 국민은행은 자산규모가 1,450억달러 내외로 LA서 가장 크다는 한미은행의 100배가 넘는다.
이 정도 은행이라면 이제 진짜 미국시장을 노려야 한다. 한국의 정상급이라면 돈도 이제 미국사람에게서 좀 벌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주류 금융시장은 사정을 모르고 만만한 게 한인사회라지만 막상 밀고 들어오면 시장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LA는 특히 9개의 로컬 뱅크가 한인시장의 구석구석을 파고 든 상태다. 국민이나 우리은행이 광활한 진짜 미국시장은 버려두고 이곳 한인은행을 사서 들어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미국 수출이라고 그럴 듯 하게 선전하지만 실상은 한인동포 시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무수한 한국수출업체들을 한국의 정상급 은행들이 답습한다는 것은 체면문제로 보인다.
게다가 지점 하나 정도를 열어 봐야 영업실적이나 경영 효율성 면에서 로컬 한인은행들과는 상대가 되질 않는다. 한국 은행의 현지 법인이나 지점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능력이 없어서 로컬 은행에 밀리는 것이 아니다.
엄연히 별도 법인체인 해외 자회사 운영을 본점운영의 종속물 정도로 생각하는 사고가 현지경영을 망가뜨리는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퇴임하는 본점 임원의 자리 마련을 위해 현지법인 행장을 무슨 장기판의 졸처럼 임기에 관계없이 뗐다 붙였다 하는 운영방식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서는, 미국식으로 운영해서, 미국 돈을 한 번 벌어 보겠다는 각오가 단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시장 진출은 지금도 자제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들어오는 역사 뿐 아니라 허겁지겁 물러나는 역사도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안상호<경제 부장>
sanghah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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