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안의 아이
정말이지 이건 대단히 낯선 현상이다. 해도 안 돋은 어스름한 새벽에 깨우지도 않았는데 슬쩍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 거기다가 오늘은 토요일이 아닌가.
토요일은 새벽예배 시간이 여섯시 반이니 새벽이 아니라 아침예배라는 담임 목사님의 말씀에도 아랑곳 않고 잠을 자던 우리 남편이 얼마 전부터는 토요일 새벽마다 교회로 달려간다. 어쩌다 늦잠을 자는 날이면 ‘좋은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서 남편을 재촉한다.
우리 교회의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남자들이 올해부터는 토요일마다 새벽예배를 가겠다고 하더니 정말 일어나서 가는 것을 보고 사실 아내들은 놀랍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한 분위기였다.
그들이 예배 후 교회에서 주는 국밥을 먹고 교회 앞 공터에서 공을 잠깐 차다 오겠다고 했을 때도 집에서 잠든 어린아이들을 지키느라 교회를 가볼 수 없었던 우리 아내들은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남자들이 새벽에 나갔다 하면 정오가 넘도록 소식이 없더니 여기 저기 여러 집에서 토요일의 일정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시어른들과 점심약속을 한 후 집에서 기다리는데 감감무소식인 남편을 찾고자 연락을 해보니 다른 집들도 비슷한 사정들이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안 돌아오는 집, 식구 모임이 있는 멀리 친척집까지 가야 하는데 애들 아빠가 안 돌아와서 늦게 생겼다는 집…
다음날 교회에서 아내들이 조각난 정보를 모아 맞춰보니 앞뒤 사정이 이랬다. 처음에는 정말이지 새벽예배에 나오는 것을 위하여 또 나날이 늘어나는 각자의 ‘배둘래햄’을 줄일 겸 시작한 조기 축구가 마음 맞는 교회 친구들끼리 모처럼 마누라와 아이들한테서 해방되어 뛰다보니 너무나도 즐거운 ‘그들만의 리그’가 된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사이에 매달 회비 5달러에 단장도 뽑고 연락 책임자와 기물담당, 음료수 담당자와 조립식 골대 담당자 등 실질적으로 즐길 수 있는 기구까지 가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열명도 안 되는 숫자였는데 이제는 고정 멤버만 스무명이 넘는다고 한다. 연락이 닿는 옛 친구들도 간간이 합세를 하여, 운동도 운동이지만 그 후에 잔디밭이나 근처의 jack in the box에서 갖는 뒤풀이도 대단히 즐거운 눈치다.
얼마 전에는 다운타운 도매상에서 단체로 하얀 유니폼까지 구입했는데 뒷 번호를 골라 갖는 과정에 오고간 남자들의 통화회수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연락의 횟수로는 우리 교회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박지성 선수나 홍명보 선수의 번호를 갖는다고 실력까지 갖는 것도 아니건만 번호의 선택에 심혈을 기울이고 중재와 양보, 버티기와 굳히기를 거쳐서 정한 각자의 번호를 박은 유니폼을 나눠 갖던 날에는 다시 한번 야단이 났었다.
기다리던 유니폼을 받아들고 둘러서서는 연방 싱글벙글 똑같은 웃음을 웃는 회원들과 참여는 못 해도 유니폼을 만져라도 보려는 청년들, 옆에서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시는 장로님들 그리고 그 시간에 일을 하느라 직접 오지 못한 회원들의 문의전화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모든 남자들이 늦도록 골목에서 친구들과 뛰다가 엄마가 불러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던 유년의 모습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금쪽같은 유니폼을 손수 손빨래로 빨아 입은 남편들이 이제는 로즈보울 앞의 잔디공원까지 진출하여 친선경기를 하고 가족들을 불러서 바비큐까지 하던 날, 여자들이 진담반 농담반으로 이의를 제기하자 여자들도 월 회비 5달러로 할 것을 찾으면 그 시간에 아이들을 봐주겠단다.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아리송한 말을 하는, 부상당한 발목에 국가대표급 보호대를 감은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자니 그 웃는 얼굴 속에 신나게 뛰놀고 밝아진 아이의 모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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