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아들·두손녀 돌보는 박종희 할머니
연이은 사고로 남편 잃고
아들마저 드러 누워
웰페어·바느질로 생계
8일 어버이날, 11일 어머니날.
보통 가정이라면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할 요즘 병상에 누워있는 아들과 학교에 다니는 손녀딸들을 돌봐야 하는 박종희(82) 할머니에게는 어머니날이 남의 말만 같다. 얼마 안되는 정부보조금으로는 집세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대학에 갈 큰손녀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박 할머니는 바느질을 하지만 바늘귀를 꿰기도 힘든 노인에게 일감을 선뜻 내주는 인정은 그리 흔치 않다.
박 할머니는 한때 보란 듯이 살았었다. 지난 80년대 초 한의사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올 때만해도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랑을 했던 그였다. 그런 박 할머니는 연이어 터진 두 번의 사고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첫 번째는 남편을 앗아간 사고 였다. 지난 1997년 11월 새벽예배를 가던 박 할머니 부부는 킹슬리와 6가 인근을 지나다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가던 용의자의 차량에 받히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남편은 한달 뒤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뒀고, 박 할머니도 얼굴과 어깨 등에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후 몇 년이 지났을까. 한국에 살던 큰아들 박춘근(48)씨가 어린 두 딸의 손을 잡고 불쑥 미국으로 건너왔다. 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고 부인과도 이혼해 새 삶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타운내 마켓에서 일을 시작하던 아들은 2002년 가을 “어머니도 늙으시고 아이들도 커가니 돈을 좀 더 벌어야겠다”며 택시 일을 시작했다. 일은 고되지만, 돈벌이가 괜찮다며 좋아했단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오래가진 않았다.
그해 10월26일 동료 기사들과 회식을 하던 아들은 괴한으로부터 머리를 얻어맞아 뇌세포 일부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은 성공했으나 뇌 일부를 잃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아들은 요양원에 들어가 기약 없는 회복의 나날만을 보내고 있지만 아들이 사고를 당한 뒤로는 생계가 막막해 졌다.
사회보장연금 757달러로는 집세를 감당하기도 힘들다. 큰손녀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박 할머니는 바느질을 시작했지만 일감 구하기도 힘들다. 어쩌다 구해도 “눈이 어두워서 바늘을 실에 끼는 게 제일 힘들다”는 박 할머니는 “한번은 30분 동안이나 바늘귀를 못 찾았다”며 서러움에 겨워 흐느끼지만 눈물이 쉽게 쏟아져 내리지도 않는다. “엄마, 아빠 사랑을 못 받는 어린것들이 불쌍하다”며 손녀딸을 걱정하던 박 할머니는 지난달 막내 손녀가 학교에서 받아온 ‘모범학생’ 상장을 보여주며 “그래도 우리 손녀가 이렇게 착하다오”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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