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독립운동 사진·문서등
1920~40년대 소중한 사료 가득
초기 이민자의 후예로 한인 2세 부부인 박운하(86)·한유희(81)씨는 이국땅에서 고난에 찬 이민의 삶을 살며 피땀 흘려 고생한 부모 세대 역사의 증언자다. 1943년 서로 만나 결혼한 뒤 60여년을 함께 살아온 이들 노부부의 집에는 한평생 소중히 보관해 온 부모 세대의 귀한 자료들이 가득하다.
한유희 여사는 바로 독립운동가 한시대 선생의 딸이며 박운하씨는 리버사이드 초기 정착민 박축섭씨의 아들이다. 이들은 1943년 중가주의 딜레노에서 결혼했다. 당시 군에 복무중이던 박씨는 한국 등에서 정보병으로 근무해야 했고, 1948년에야 신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제대 후 LA인근 잉글우드시로 이주한 부부는 이 곳에서 ‘에이린 머피 꽃집’을 20년 동안 운영했으며 1975년 은퇴 후 론데일시의 이쁜 단층집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중가주 딜레노 지방에서 한인 최초로 대형 농장을 운영했던 거부로 국민회와 흥사단을 오랜 세월 이끌었던 한시대 선생의 딸 한 여사는 부친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수많은 옛 사진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옛 흥사단원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 한씨는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30∼40년대에 안창호 선생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외에도 공중에서 찍은 딜레노 농장 전경, 광복 후 미주대표로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부친, 스탠포드 의대를 졸업한 뒤 LA에서 병원을 개업했던 작은 아버지 한영대씨, 1919년에 찍은 가족 사진 등이 한시대 선생 일가와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리버사이드 한인촌의 평범한 농부였던 박충섭씨와 사진신부 이정경 여사의 장남인 박씨는 부친이 남긴 다양한 문서와 증서를 간직하고 있다. 이 중에는 1909년 나온 신한민보의 발행당시 증권과 당시 페차파 한인촌 지도 등 귀한 자료도 적지 않았다. 박씨는 “아버지는 돈을 모으면 신한민보 등 한인 기업의 주식이나 채권을 샀다”며 “이제는 이렇게 한 장의 종이에 불과 하지만 당시에는 그 돈이 독립운동의 젖줄이 됐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박씨 부부는 “우리는 아버지 세대의 영향으로 일본을 너무 싫어했는데, 우리 딸 셋 중 두 명이 일본 남자와 결혼했다”며 세상이 참 빨리 변했다고 자신들의 삶을 회상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기자에게 노부부는 “세월과 함께 미움이 사라져 좋긴 한데, 요즘 사람들은 꼭 간직해야 할 소중한 유산도 너무 쉽게 잊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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