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센서스국의 2000년 인종·민족별 사회 경제지표 통계 중 일부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한인 중 대졸 이상 학력자는 한국 등 해외 출생인 경우 48.9%를 기록했다. 이 통계는 해외 출생 아시아계 59.9에 비하면 의외로 얕은 수치이지만 미국 출생자 평균 31.0%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수치다.
이 센서스에 참여한 한인 10명 중 5명이 대졸이라는 것은 한인사회를 이끌어나갈 인재, 한인사회를 비춰 줄 등대(燈臺)가 그만치 밝다는 얘기다. 그러나 학벌이 곧 등대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학벌이라는 심지에 불을 붙였을 때 등대는 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이 이치로 학벌이 행복이나 사회기여도의 척도가 될 수도 없다.
얼마전 미국의 한 명문대학의 동창회의 한 관계자가 동창회 명부를 발간하면서 58년도 동창생들 중 최소한 25%에 해당하는 4명중 1명이 인생에서 낙오(落伍)했고, 그들 중에는 푸드 스탬프를 받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충격적인 일이라고 그 관계자는 전제하면서 이젠 우리 대학 졸업장이 선망의 대상도 아니고, VIP의 상징도 아니라고 자탄했다.
그리고 금년 연초,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 퍼레이드가 있을 당시 ‘당신을 VIP로 모시겠습니다’라는 말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VIP, 이 VIP라는 말이 사전적 의미를 넘어 일반인이 그 뜻을 인식하게 된 것은 판촉(販促)의 한 수단으로 “당신을 VIP로 모시겠습니다"라는 선전 매체 이후부터이다. 그런데 이 ‘판촉 VIP’가 판촉 이외에 학벌, 금력, 직업, 지위, 지명도 등을 바탕으로 ‘권위 내지 차별 VIP’로 비약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 중 학별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유니버시티(University·대학)라는 단어는 유니버설리즘(Universalism·보편구제설)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대학은 보편주의에 의해 누구나 민주·자유·평등한 삶을 연구하고 익히며 또 지키는 곳이다. 그런데 단골 흡수를 위해 모시겠다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란 딱지를 학벌에 갔다 붙인 것은 대학 본연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또한 지명도가 높다고 해서 VIP로 모시겠다는 발상도 매우 거북 쌍 스러운 말이다.
‘당신을 VIP로 모시겠다’면 듣기만 해도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말이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좌(權座)란 항상 권위의식을 갖게 하는 자리다. 권위는 권력에서 파생하는 위력으로 그것은 행사한 만큼 대중심리가 권력자로부터 이탈(離脫)하고, 벗어난 만큼 결집(結集)하게 되어있다.
백악관에서 자기 구두를 자신이 언제나 닦아 신었다는 링컨을 역대 대통령 중 탈권위(脫權威)의 제1인자로 꼽고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돈이 무엇이기에! 권좌(權座)가 무엇이기에! 란 말을 요즘 한국의 특검 파동을 두고 많이 얘기하고 있다. 여기 돈과 지위를 초월, 소탈한 입장에서 자기 색깔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삶의 표본 하나가 있다.
우리의 전통 음식인 콩비지, 빈대떡, 된장찌개를 손수 만들어 파는 치과의사에 관한 얘기다. 한국 S대 치과대학을 나와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어느 중년 의사,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의사가 아니다. “아랫목"이란 음식점을 차려 놓고 흰색 가운 대신 T셔츠 청바지에 앞치마를 두르고 환자 대신 손님을 맞는다. 때때로 손님과 마주 앉아 세상 사라가는 얘기도 같이 한다. 같은 대학 동문으로 독일 유학까지 함께 다녀온 부인도 그를 따라 의사를 포기하고 남편을 거든다.
그는 원장님이나 선생님보다 아저씨라는 호칭이 더 듣기 좋다면서 『체면을 앞세우거나 남 눈치보며 산 적이 없습니다. 남이 좋다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론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고싶은 일만하고 살아도 짧디 짧은 인생이 아닙니까. 매상이 월 2,500불 남짓이니 수입으로 치면 치과의사가 훨씬 났지요. 그러나 의사라는 직업이 가식이 많다고 느껴져 언젠가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결국 40세가 되던 생일날 후배에게 병원을 넘겨주고 이렇게 나섰습니다.』
이런 경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학벌을 훌훌 벗어버리고 남과 비교함이 없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의사 선생님보다 아저씨란 말이 더 듣기 좋다는 그의 말은 감동적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와는 정반대로 공부께나 했다고, 돈냥이나 있다고, 무슨 무슨 자리에 있다고 목에 힘을 주고 있는 사람, 더 괴이한 것은 목에 힘을 주고 있는 사람의 목을 떠받들고 같이 장단을 맞추고 있는 물간 사람(물간 이)들을 보게된다.
학력과 사람됨은 겉과 속과 같은 것으로 비례될 수 없는 개념에 속한다. 학력은 없어도 사람됨이 출중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한다. 학력은 높아도 정신수준이 바닥인 사람을 졸부(拙夫)라고 한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전후 해 민주주의(民主主義)란 말이 떠 돌 때 민주주의의 정의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것으로 풀이한 적이 있었다. 민주주의의 정의를 이렇게 풀이한 것은 인권에 관한 한 정말 그럴싸한 말이다. 그런데 VIP 란 말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판촉(販促)일 경우에도 일단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항공사에서도 보통석을 코치니 에코노미 크레스, 특석을 비지네스 크레스라고 하지 VIP석이라고는 안 한다. VIP가 대중심리를 이탈시키기에 예민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종 모임에서 호칭과 좌석 배치에 신경을 써야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ikhchang@a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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