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해가 길어서 그런가, 여름 노을은 유달리 붉고 오랫동안 지상에 머물러 있다. 노을을 보면 그냥 애틋해지는 것이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싶은 마음을 흐트려 버린다.
모처럼 한가한 저녁, 마음 편하게 바라본 노을이 서서히 스러지면서 먹빛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만화 같기도 하고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 저절로 머리 속에 그려진다. 정확히 뭐라 잡히지는 않지만 느린 동작, 어눌한 표정, 시어같은 말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것이 요즘 나의 병이다.
<장면 I - 1980년대 중반 강원도 어느 별장의 벽난로 앞>
벽난로가 지펴진 산 속 별장, 불붙은 나무가 온몸으로 타는 소리만 타닥타닥 정적을 깨뜨릴 뿐, 말없이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 1, 그 옆에 앉아 역시 한마디 말 없이 장작을 계속 넣으며 불을 지피는 여인 2. 문밖에서는 흰 눈이 사락 사락 내리고 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여인 1의 양 볼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번져 내린 눈물에 불빛이 비치어 볼이 붉게 빛난다.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여인 2가 조용히 하는 말.
"놓친 기차는 아름다운 법이야."<장면 II-2003년 여름 뉴욕 플러싱에 사는 40대 주부>
분첩을 꺼내 얼굴을 두드리며 마무리 화장을 하던 40대 여인, 유리창 너머 멀리 내다보이는 길. 아득히 보이는 먼길이다. 순간 달아나고 싶다. 그녀에게 주어진 모든 책임과 의무를 잊어버리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미혼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현모양처라는 것이 정말 낯설었기에, 고독과 허무감에 지쳐 쓰러질지언정 방랑자를 꿈꾸었던 그녀였기에, 종종 결혼 체질이 아닌 자신을 느낀다. 여인의 차는 큰 도로로 나서더니 갑자기 출근 방향과 정 반대로 차를 돌려 속도를 높인다. 결국 돌아올 것이지만 날아갈 듯한 가출이다.
누구든지 살아가는 동안 스무 살이면 스무 해 동안 살아온 것들에 대해, 마흔 살이면 사십년동안, 예순 살이면 육십년 동안, 꼭 그만큼 쌓인 추억과 기억들을 돌아볼 때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과거사에서 참 잘 살았지, 정말 잘했지 하는 만족감보다는 그때 나는 왜 그리 했을까? 좀더 잘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먼저 든다.
하다못해 스쳐 지나간 인연도 좀더 성의 있게, 성실하게 대했더라면 인연이 될 수도 있지 않았는가 할 때가 있다. 이럴 때 하는 명언이 "놓친 기차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과거에서 놓여날 수 없다. 그래서 죄 짓고 못산다는 말이 있고 베풀고 산 사람은 당대에 못 받으면 다음 세대에서라도 그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평생동안 여러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직장 운이기도 하고 증권이나 주식 복이기도 하고 남자에게는 여자, 여자에게는 남자 복이기도 하다. 우리는 놓치고 난 다음 아차, 하고 후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았어도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기차인 줄 모르는 법이다. 당연히 내게 올 것이 온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우리가 놓쳐버린 기차는 계단식 밭이 정겨운 산마을을 지나고 노을빛에 물든 바닷가 마을을 끼고 돌기도 하고 옥수수대가 하늘높이 솟은 밭을 한밤중에 지나가며 새벽 안개를 마주보고 미지의 나라로 달려가기도 할 것이다. 그 신비하고 고요하며 쾌적한 기차는 상상만 해도 그 안에 올라타고 싶다.그 기차를 놓치고 다음에 온 기차를 탄다고 해도 사실은 그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내가 타고 보니 기차 안은 비좁고 후덥지근하며 아무리 가도 창밖 풍경은 늘 보던 산과 들로 변화가 없어 마치 태엽 풀린 시계처럼 느릿느릿 흘러가는 삶이 지루하기 이를데 없다.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고 더 이상 못 간다고 앙탈 부릴 수도 없고, 그것이 인생이다. 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모든 기쁨과 실망, 절망까지도 사그리 안고 달리는 기차, 그 곳을 편하고 밝게, 시원하고 때로 따스하게 만드는 것은 본인 몫이다.놓친 기차는 아름답다-아름다움은 자기가 만든다-자기가 만드는 것이 인생이다로 말꼬리를 이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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