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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1917년, 1차 세계 대전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 전선이 서부에 집중됐다. 독일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영국을 꺾어 전세를 뒤엎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공격작전을 전개했고, 이 와중에 미국 상선 여러척이 독일에 의해 격침됐다.
당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전쟁 참여의 명분을 찾기 위해 중동에 관한 비밀 조약 내용을 알려달라고 영국에 요구했다. 미국을 끌어들여야 전쟁에 이길 것이 분명하기에 영국은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상’의 내용을 미국에 공개했다. 1차 대전 발발 직전에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경과 프랑스 외교관 프랑솨 피코가 비밀리에 오스만 투르크가 점령하
고 있는 중동 지역을 서로 나눠먹는다는 협상에 전격 타결했다.
내용인즉, 지금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반도는 영국보호령으로 하고,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령으로 하되,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을 전후 국제기구에 의해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이 비밀 문건을 보고, 고차원의 정의에 의해 평화가 정착되지 않는 한 한세대(30년) 내에 각 민족에 의해 대규모 유혈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영국이 1차 대전때에 중동문제에 집착한 것은 독일을 이기기 위해 동맹국인 투르크를 우선 붕괴시켜야 하고, 그러려면 아랍인의 독립을 부추기고, 유럽과 북미 지역에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지원을 얻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 상선대를 공격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1차 대전에 참전하면서도, 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을 피했다.
당시 영국인들은 두가지 가설에 입각해서 중동문제에 접근했다. 첫째는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할 것이며, 둘째는 아랍인들이 스스로의 통치력이 없기 때문에 영국이 보호국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비밀협상에 가담했던 영국의 사이크스경은 이 가설을 믿었지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를 믿지 못했다. 중동에 유혈의 불씨
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1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당시 영국의 아서 밸포어 외무장관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창설을 약속했고, 아랍의 제후국들에게 독립을 약속했다. 이른바 밸포어 선언이다. 나중에 영화의 주인공이 된 영국인 T.E. 로렌스는 아랍 민족을 부추겨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유럽에 산재한 시오니스트들은 꿀이 흐르는 요단강 서안으로 본격적인 민족 대이동을 전개했다.
1차 대전에서 투르크 제국이 패전하고, 연합국이 점령한 중동에선 윌슨 대통령이 예측한 대로 유혈 분쟁이 시작됐다. 팔레스타인에선 유대인과 아랍인의 유혈 충돌이, 영국의 보호령이 된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반도에선 영국의 부추김으로 고양된 아랍인들의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2차 대전을 전후로 중동에서 철수하고, 각지의 부족(에미레이트)들
은 마침내 독립을 얻게 된다. 오늘날 중동의 분할은 이렇게 해서 형성됐다.
9.11 테러가 발생한지 2년을 맞는다. 그사이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미국은 중동의 과격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 미국이 내세우고 있는 중동 평화안의 가설이 한 세기전에 영국이 세웠던 가설과 너무나 흡사하다. 미국이 제안한 팔레스타인 로드맵은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가 나란히, 사이좋게 공존하는 것이다. 또 미국은 이라크인들이 스스로의 통치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지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국과 함께 군정을 지속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20세기초 제국주의 국가였던 영국이 인위적으로 유대인 국가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의 불씨가 마련됐고, 메소포타미아의 바스라와 바그다드를 점령했다가 10여년만에 철수해야 했다. 한세기 전에 영국이 세웠던 가설이 틀린 것으로 입증됐다. 미국이 중동의 평화를 정착시키려면 제국주의 영국이 세웠던 가설에서 벗어나야 한다.
i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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