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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프랑스의 동양사학자 르네 그루쎄는 저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이 중동을 공격하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몽골군은 도시를 점령해 철저히 파괴했고, 농토를 파괴해 목장으로 만들었다. 몽골군의 잔인함을 두려워 주민들이 땅을 파고 숨거나 동굴로 대피하자, 그들은 돌아갔다가 다시 쳐들어와 살아남은 사람을 살해했다. 포로도 없었다. 그들은 점령한 곳을 ‘저주받은 도시’라고 명명했다.
13세기에 중앙아시아 평원을 평정한 몽골군이 아프가니스탄 산맥을 넘어 중동지역을 공격했다. 그들이 살상한 주민이 80만명에 이른다고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슬람 1,5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시기였다. 하지만 몽골은 중동을 통치하면서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몽골 후예인 티무르 제국은 이슬람을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 파키스탄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아직도 중동인들의 가슴 속엔 750년전 몽골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그 몽골군이 또다시 중동으로 갔다. 이번 몽골군 180명은 침략군이 아닌, 평화유지군으로서 바그다드에 입성한 것이다. 중동의 또다른 지배자는 터키였다.
몽골군이 물러난 뒤 터키(오스만 투르크 제국)가 북아프리카에서 발칸반도에 이르는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형성, 20세기초까지 700년간 중동을 통치했다. 투르크는 아랍인과 민족이 다르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로 중동을 순치했다. 투르크의 술탄은 최고 통치자인 황제이자, 최고 종교지도자(칼리프)로서 아랍인들의 순종을 얻어냈다. 아랍인들은 20세기 초반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열강의 부추김으로 노쇠한 투르크에 저항, 독립을 쟁취했지만 그 결과는 아랍권의 분열이며, 이는 이 지역에 새로운 유혈의 씨를 뿌렸다.
중동의 오랜 통치자였던 터키도 이번에 미국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라크에 파병키로 했다. 지난 3월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위해 지상군 공격로를 내달라고 했을 때 경제 지원을 마다하고 거절했던 터키 의회는 이번에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라크 파병을 승인했다. 파병인원은 몽골보다 많은 1만명이다.
몽골과 터키는 중앙아시아 초원과 사막에 근원을 두고 있는 유목민족으로, 역사의 어느 시기에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민족이다. 지금은 쇠잔해졌지만, 이들 민족이 다시 중동의 중심에 군대를 보낼 때는 끊어진 역사에 고리를 연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 시점의 국가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다.
몽골은 만주족의 청에 의해 주권을 잃었다가 1921년 청이 손문 정부에 의해 무너지자, 만주족에 대한 의무가 없어졌다며 독립을 선포했다. 몽골은 끊임없이 중국으로부터 주권을 위협당했고, 소련에 의지해 독립을 유지했다. 소련 붕괴 후 몽골은 러시아와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경제 발전과 주권 유지를 위해 미국에 기댔고, 이번에 아랍인들의 역사적 피해의식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터키의 파병도 과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연초에 미군에 길을 내주지 않은 결과로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더 이상 미국에 등을 돌려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미국의 85억 달러 지원 약속이 터키 의회 표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한국은 몽골, 터키와 함께 동양인 가운데에도 우랄알타이 어족에 해당한다. 세 민족이 어순이 같고, 말의 뿌리가 서로 통한다는 것이 언어학자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한국은 몽골과 터키와 달리 중동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결고리가 거의 없다. 한국에서도 이라크 파병을 놓고 찬반 양론이 엇갈려 있다.
10년전에 미국의 적성국가였던 몽골이 안보(주권)를 위해 이라크에 파병하고, 한때 아랍의 맹주였던 터키가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해 파병을 결정한 것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안보와 경제 문제에 관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미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국가 이익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 나아가 어떤 이득을 얻어내는가 하는 것이 인식의 오류에 빠져 있는 일부 지식인들의 허영심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i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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