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월동 준비로 연탄 사재기와 함께 했던 것이 김장이다. 반찬이 없어 그랬는지 60포기 정도야 기본이었고 좀 식구가 있는 집은 100포기가 넘게 담그곤 했다. 갓 무친 김치 속에 굴을 얹어 입에 넣어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지난 주말 이형숙 씨(녹양회 회장)와 녹양회 회원들은 그녀의 집에 모여 김장을 담갔다. 자기네 집 식탁을 위한 김치는 사먹는 그녀들이 갑자기 유난스럽게 김장을 담그게 된 데는 다 사연이 있었다.
이번 해의 동문 연말 모임에 유난히 젊은 유학생들이 많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녀들은 자신들이 처음 유학 와서 고생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김치 한 조각이 ‘금치’였던 시절. 가난하고 배고픈 유학생을 위해 가끔씩 선배들이 김치를 나눠줄 때의 그 고마움은 세월이 흘러 먹고 사는 것 걱정이 없는 지금까지도 그녀들의 가슴팍에 그대로 간직돼 있었다.
모임에 참석한 후배들에게 김치 한 병이라도 들려 보내자는 의견에 앞뒤 잴 것도 없이 만장일치로 찬성을 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132포기’의 김치를 담는 과정은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마켓에서 배추 11박스와 무, 그밖에 고춧가루와 마늘 등 양념거리를 구입해 실어 나르느라 이형숙씨는 평생 팔자에 없는 트럭을 운전해 보기도 했다. 커다란 드럼통에 배추를 담고 소금을 뿌려 하루를 재운 뒤 다섯 명의 녹양회 회원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모여 앉아 배추를 썰고 무를 채치며 김치 담는 준비를 마쳤다.
평소 요리 솜씨가 좋은 양평자 씨가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버무린 김치를 유희숙 씨는 병에 담았다. 박온순씨가 병마개를 막으면 이영경 씨는 병 주변에 뭍은 김치 국물을 닦는다. 마지막 생산 공정 라인의 이형숙 씨는 김치 병에 녹양회 스티커를 붙이고 박스에 차곡차곡 쌓았다.
중간에 재료가 부족하면 다시 나가 장을 보기도 하고 일을 벌인 김에 무말랭이 무침까지 130여 박스를 만들었다. 새벽부터 쪼그리고 앉아 이틀 동안 중노동을 한 탓에 다음 날에는 다섯 명 모두가 몸살로 앓아누웠다.
남편이 사면 될 것,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며 핀잔을 줄 때 괜한 짓을 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모임에서 김치를 나눠 줄 때 후배들의 환한 표정을 보는 순간 이제까지의 고생은 자취를 감춘 듯 사라졌다.
선배님, 김치 너무 맛있어요 라는 전화를 받는 그녀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그럼, 몇 번을 씻어가며 얼마나 정성껏 만든 것인데 맛이 없으면 되나. 예전 같지 않아서 요즘 김치 한 조각이 아쉬울 만큼 어려운 유학생들은 흔치 않다. 하지만 가족과 멀리 떨어져 배보다 영혼이 고픈 것이 이들. 사랑을 가득 넣은 김치 한 병을 선물 받은 후배들은 올 겨울 내내 선배들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할 터이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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