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백인이야 백인! 흑인이 아니라구…
새영화 ‘휴먼스테인’
미국의 흑백갈등은 오래 전부터 앓아온 종기처럼 흔적이 남이 있다. 겉으로는 더 이상 인종차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피부색이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다.
로버트 벤튼 감독이 필립 로스의 소설을 토대로 만든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은 미국인이라면 겉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기에 조심스러운 미국의 인종차별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백인이 되고 싶은 흑인 콜맨(안소니 홉킨스)이다. 그는 마치 피부를 표백했다는 마이클 잭슨처럼 흰 피부를 갖고 태어나 백인사회의 주류로 편입, 저명한 대학의 학장까지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긴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에 검은 뿌리가 자신에게 치명적인 오점(stain)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강의 도중 실수로 내뱉은 속어가 백인의 입장에서 흑인을 경멸한 인종차별적 발언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실직하게 된 마당에도 결코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오점을 묵묵히 끌어안을 뿐이다.
해묵은 고통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 앞에 대학 청소부로 일하는 관능적인 여인 퍼니아(니콜 키드먼)가 나타나자 둘은 나이와 신분을 떠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열정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로 미국 중산층 가정의 이혼문제를 조명했던 로버트 벤튼 감독은 인종차별문제를 감정과잉으로 치닫지 않고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만 간간히 나타나는 심도 깊은 인물 클로즈업은 등장인물의 고통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이같은 절제된 영상은 오히려 드러내 놓고 펑펑 우는 연기나 격앙된 어조로 비난하는 대사보다 힘이 있다. 여기에 배우들의 호소력 짙은 연기도 작품의 무게를 더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쉽게 느끼기 힘든 인종차별문제여서 공감대를 느끼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어느 사회든 있을 수 있는 편견으로 개인이 겪게 되는 고통을 제대로 표현해 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다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가 시종일관 관객을 무겁게 짓누르는 점이 부담스럽다. 3월5일 개봉.
최연진 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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