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할리웃 보울의 연주 스케줄을 들여다 보며 문득 디즈니 홀의 첫 시즌이 후반에 들었음을 안다.
지난 가을 역사적인 개관에 앞서 있었던 LA 필하모닉의 마지막 리허설에서 느꼈던 진한 감동을 베르린의 친구에게 써 보냈던 일이 떠 오른다.
이상한 연주장 이었다,
무대 앞쪽에 두세단의 객석이 있는 것뿐 아니라 지휘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뒤에도 또 무대 양쪽 옆 위에도 좌석이 있다.
어느 좌석에서건 오케스트라와 가깝게 느껴지는 아늑한 공간이 모두 부드러운 나무 패널로 꾸며져 있다.
여기저기 빈자리가 많은 생소한 연주장에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향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들릴락 말락한 작은 북 소리 장단에 플륫의 섬세한 멜로디가 실려 반복되더니 부드러운 클라리넷이 넘겨받아 같은 주제를 조용히 되풀이한다. 누가 나무랄까 두려운 듯 금속성이 절제된 혼과 묵직한 바순이 주제 멜로디를 조심스럽게 받아 또 다시 반복하고 있다.
모든 현악기들은 잔잔한 피찌카토만 울려댄다. 어느새 오보우가 빼꼼한 소리를 내더니 트럼본과 팀파니가 합세하면서 오케스트라의 화음은 점차로 커져 갔다.
뉴욕타임스가 차세대의 피에르 불레즈냐 레나드 번스타인이냐고 칭송하는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 에싸-페카 쌀로넨은 연미복이 아니고 평소 그가 즐겨입는 까만 티셧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다. 모든 단원들도 제 멋대로 평상복 차림이다. 그렇다, 오늘은 정기 연주회가 아니고 리허설의 저녁이다.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LA 필이 특별히 초청한 전현직 이사, 방대한 LA 필과 할리웃 보울의 직원들과 오케스트라 단원의 가족들이었다.
곡면으로된 스테인리스 스틸 벽들이 어우러진 특이한 외관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지어낸 사람들도 초청되었다. 90년대 당시 LA 필의 유일한 아시아계 이사였던 나는 친구 부부를 초청해서 함께 참석했다.
이제는 현악기들 마저 참여해서 똑 같은 곡조를 반복하며 서서히 빨라지고 커져만 간다.
스페인의 선술집. 요염하게 볼레로를 추는 여인을 남성들이 둘러쌌다. 고조되는 음악에 못 이긴듯 무희는 탁자위로 번듯 올라섰다. 치마를 훌쩍이며 눈 맞춤을 하고 고혹적인 춤은 계속된다. 남성들의 눈에 흥분의 빛이 진해지며 볼레로는 더욱 광란해 가고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엮어내는 음악에 연주장이 공명한다. 디즈니 홀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악기가 되어 관중들의 귀청을 울리고 있다. 가장 조그만 악기가 가장 높은 소리를 내는 피콜로 마저 흥분해 서 트럼펫과 경쟁이라도 하듯 부르짓고 있다.
영화 ‘10’에서 보 데렉이 산들바람 날리는 커텐 옆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 들려오던 이 곡을 기억하 는가.
긴장과 흥분의 절정에서 17분간의 음악은 멈췄다. 휴우---, 관중은 일어섰다. 환호의 박수와 함께. 연주 현장에서만 보고 들으며 느낄 수 있는 이 희열.
LA 필하모닉과 쌀로넨 그리고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이제 로스 앤젤레스는 더 이상 문화예술의 변방이 아니다.
오 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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