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조선왕국의 대표로 워싱턴을 방문한 보빙사절단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가 14일 오후 8시 기쁜소리방송 공개홀에서 미주한인재단 워싱턴지부 주최로 열렸다.
이날 행사에선 임희순 한인사 편찬위원이 수집한 보빙사절단 관련 사진전이 개최됐으며, 홍선표 박사(사진.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가 ‘보빙사절단 워싱턴 방문과 오늘의 한미관계’에 대해 강연했다.
강연에서 홍 박사는 “조선 말기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며 궁지에 몰린 조선인들은 미국을 구원세력, 군자의 나라로 보면서 짝사랑했지만 미국은 자신의 국익에 따라 한반도 정책을 집행했을 뿐”이라며 “이러한 사정 때문에 왜곡됐던 한미관계가 이제 21세기에는 이성적인 관계로 정상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보빙사절단 122주년 기념식에선 한국예술원(원장 조형주, 서순희)의 축하 국악 공연도 곁들여졌다.
보빙사절단이란...
고종 20년(1883년) 조선 역사상 최초로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이었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미국 공사 L.H. 푸트가 조선을 방문한 답례로 이듬해 보빙사절단은 파견됐다. 보빙사절단에는 전권대신 민영익,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등을 비롯해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 당시의 쟁쟁한 개화파 인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미국에서 박람회, 병원, 신문사, 육군사관학교 등을 방문·시찰하고 돌아간 사절단은 이후 조선의 개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민영익은 우정국을 창시해 신식 우편제도를 도입하며, 서광범은 뉴저지 럿거스대학에 유학해 미국 시민권까지 획득한 뒤 조선 정부의 법부대신과 학부대신을 지낸다.
따라서 보빙사절단은 한미 관계의 시발점이자 미주 이민사의 시작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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