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임영균씨가 백남준씨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 1984년 1월1일 뉴욕타임스에 게재됐다.
자유인 백남준을 추모하며
메이 정 <앤드류 샤이어 갤러리>
삶과 예술을 치열하게 살아낸 자유인 백남준이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모두 세월 앞에서 속수무책임을 절감한다. 백남준만큼 큰 영향력과 예술적 무게를 지닌 한국 예술가는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것이고 아직도 예술가의 길을 정리하기엔 그의 작업들이 늘 새로웠기에 그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올해 5월4일에 전시하게 되는 백남준 사진전이 추모전으로 바뀌게 되어 안타까움은 더 하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 인류의 위기를 예언한 해인 1984년 정초 한국을 비롯한 세계주요 국가의 텔리비전에 방영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지구촌을 하나의 정보 울타리로 설정한 문화 이벤트를 리얼타임으로 보여 주었으며, 고국을 떠난 지 34년만에 금의환향한 후 우리 주변에서 백남준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84년 한국에 도착하며 남긴 ‘예술은 사기다’라는 백남준식 예술론으로 우리를 당황하게 했던 그는 예술의 미학적 최고가치를 ‘소통으로서의 예술’ ‘신체화된 예술’로 보았으며 피사체에 대한 완벽한 재현을 가능케 하는 비디오의 기능을 리얼리즘의 완벽한 매체로 보았다.
무조음악을 비롯한 12음 기법으로 음악기법을 개혁한 서양음악의 선구자 아놀드 쇤베르크나 예술작품을 완성된 상품으로서의 생산개념보다는 생산과정으로서의 프로세스 미학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던 ‘플럭서스’(fluxus)를 이해하지 않고 바라본다면 그의 비디오 예술이나, 퍼포먼스, 행위음악들은 관객에 대한 충격이나 기이하고 우발적 행위로만 비춰질 것이다. 그러나 세계 미술계에서 그의 작품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치열하게 실천한 위대한 예술가라는 일치된 관점을 갖고 있다.
한국인의 의식과 생명력을 하이테크 이미지 언어로 세계와 자유롭게 교류했던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개념과 가치들의 전복을 감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1932년 나라가 국상을 당하였을 때 만조백관이 입을 상복과 제복 전부를 만들었던 조부와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운영하던 부친을 둔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늘 돈에 자유로워 본 적이 없는 길고도 고단한 예술가의 길을 살아낸 백남준.
적어도 자신에게 예술의 방법론을 알려준 존 케이지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2012년까지는 살아남아 케이지를 추모하고 자신과 케이지의 예술적 만남을 환생시키고 싶다던 그는 2012년이 채 되기 전 떠났고 그의 격렬했던 저항정신과 참여, 소통의 예술도 이제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미술을 견고한 구성위주의 전통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인문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반항적이고 전위적인 정신으로 실천하던 백남준의 예술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한다면, 백남준 이상의 예술적 부피를 지닌 예술가들을 우리는 앞으로 계속 배출할 수 있을 것이며 백남준의 치열한 정신과 그의 예술의 화두인 위트와 아이러니는 변함없이 우리 곁에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할 것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