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야구를 한국에 처음 도입한 것이 1905년이니까 올해로 101년째가 된다. 그 당시 시대적인 배경으로 보아서 야구는 일본사람들의 손을 거쳐 들어왔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 선배들이 야구를 할 당시 모든 야구 용어는 일본어 일색이었다. 심지어 중계 방송하는 아나운서들도 4번 “빳따”(타자), “호므랑”(홈런), “빳떼리”(배터리-투수와 포수를 묶어서 말하는 야구용어)라고 태연히 말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요즈음 WBC 야구대회에서 한국팀의 선전을 보면서 많은 한인들이 야구에 관심을 갖고 흥분을 하고 있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일본의 그늘 아래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얻어터지고 좌절을 겪었는지 모른다. 아시아 무대에서 만년 2위 자리를 고수하며 갈고 닦은 실력이 드디어 오늘에 와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한국 야구의 지난 100년 세월을 간단히 그려보면 일제시대의 한국 유학생들과 질레트 선교사 휘하 팀들의 활약이 있었고 1963년 서울에서 벌어진 제5회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바 있다.
이때쯤 야구 선진국인 일본에서 실력을 닦은 “재일교포 모국방문 친선경기”를 통해 한국의 고교 선수들의 실력이 향상됐고 드디어 1982년에는한국에도 야구를 하면서 돈도 버는 프로구단이 시작됐다.
바로 이전 1997년에는 니카라과에서아마추어 선수들의 수퍼 월드컵 대회가 있었고 이 시합에서 미국, 일본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한 바 있다. 그 후 이원국 (한국 최초의 미주 프로야구 진출). 박철순, 최동원 등이 있었지만 도중하차했고 1993년 박찬호가 LA 다저스에 입단하며 30여명의선수들이 미 프로야구에 발을 들여놓았다.
오늘날 미국과 일본을 보기 좋게 물리쳤지만 사실은 일본과 미국에 많은 선수들이 진출한 것이 오늘 이러한 결실을 맺은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50년 이상을 야구를 보아 왔지만 한국의 국가 대표팀이 한, 미, 일 3개국에서 활약하는선수들이 힘을 합쳐 군웅할거하는 플레이를 처음 보았다.
2006 WBC 대회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야구의 국제화다. 모든 선수들이 각자 자기 나라에서 태어나 야구를 시작했지만 “메이저리그”라는 거대한 시장을 겨냥해서 키운 실력이 결국 오늘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아직 시합은 끝나지 않았지만 남미의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쿠바(유일한 아마추어 팀)의 힘이 좋은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의 수준을 올려놓았고 한국, 일본, 대만 그리고 장차 중국선수들이 그 뒤를 이을 것으로 점쳐진다. 그리고 남가주에서 1995년부터 시작된 “꿈나무 야구교실”을 거쳐간 수백 명의 어린 선수들도 이에 해당된다.
베리 민/ 꿈나무 야구교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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