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잎새 하나 내지 않을 듯 딱딱하던 나무 가지에 어느새 잎들이 무성하고, 꽃나무 가지마다 꽃들이 만발했다. 완강하게 옹 다물고 있던 겨울눈들이 봄바람에 몸을 열어 잎을 만들고 꽃을 만들었다. 때가 무르익으면 저절로 그러해지는 것,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한국 정치사에도 봄이 왔나보다. 한국에서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 4년 전에는 한바탕의 입씨름 후 무산되었던 일이 이번에 현실이 되었다.
그 10년, 그 4년 동안, 사실은 그 훨씬 이전부터 한국사회 구석구석에 꾸준히 불어든 ‘봄바람’ 덕분이라는 생각이다. 초등학교 반장부터 사법 연수원 수석졸업자까지 여성들이 휩쓰는 ‘여성바람’이 얼음처럼 차갑던 성적 편견을 녹여내고 여성총리 탄생의 토양을 만들어냈다.
한명숙 신임 총리 임명을 둘러싼 해석은 구구하다. 당장 다음달에 지방선거를 앞둔 노무현 정권이 돌아설 대로 돌아선 민심 회복을 위해 내놓은 정국 돌파용 카드, 선거용 카드라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국정운영 능력이나 자질보다는 ‘여성 총리 1호’라는 상징성을 보고 그를 발탁했다는 분석이다.
상당 부분 그것은 사실일 것이고, 사실이라 해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여성’을 내세우면 국민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고, ‘여성’이 나서면 충돌과 대립으로 깊어진 상처를 보듬을 수도 있을 것으로 정치권이 계산한다는 사실이다. 때가 무르익으니 드디어 여성 지도자, 여성 리더십에 대한 거부감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은 왜 여전히 뉴스이고 사건일까. 여전히 어렵기 때문이다. 한 총리 역시 총리로 지명 받은 직후 “이 땅의 딸들에게 희망을 주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여성으로서의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법적, 제도적 조건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다. 남녀 차별 없이 똑같이 교육받고, 취업 기회의 문도 공평하게 열려있다. 조직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비슷한 조건이다.
하지만 조직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대개 상황이 달라진다. 능력이 비슷한 경우, 혹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남성은 여성보다 조직에서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가는 게 현실이다. 어느 조직에서건 남자 후배들이 승진 사다리를 겅중겅중 먼저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좌절과 분노, 박탈감에 사로잡혀보지 않은 여성은 별로 없다.
여성을 뒤쳐지게 만드는 것, 남성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쉽게 꼽을 수 있는 것은 네트웍과 멘토이라고 본다.
남성중심 문화권에서 남성들은 어디를 가든 쉽게 학연, 지연, 하다 못해 군대 동기로라도 인맥 형성이 가능하다. 그리고 조금만 가능성이 보이면 선배나 상사가 스스럼없이 멘토로 나선다. 후배의 조직적응을 돕고,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네트웍에 줄을 대주고, 정보를 주며 소위 자기 사람으로 키워주는 일이다.
미국 기업의 경우 고위 임원들의 80%는 멘토를 가졌다고 한다. 그만큼 멘토가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똑같이 산을 오르는데 자기 힘만 의지해 땀 뻘뻘 흘리며 올라가는 사람과 이미 산정에 오른 사람의 조언을 받으며 느긋하게 오르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어느 지점은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 어느 길이 지름길인지, 누구와 어울려 가면 도움이 되는지 … 충고해주고, 잘 하고 있다고 박수 쳐주는 것이 멘토링이다.
‘여성 1호’들의 탄생은 여성으로서 걸어보지 못한 땅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다는 의미가 있다. 뒤에서 따라오는 후배들에게 ‘그 길은 이렇더라’며 멘토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한명숙 총리는 이제까지 한국 여성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을 시작한다. 그 산정에 올랐다는 사실, 그 길을 따라가는 후배들에게 멘토가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딸들에게 희망’이 된다. 한 총리가 부드러움과 포용성이라는 여성적 리더십과 함께 업무 능력으로 성공한 총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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