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5.31 지방선거는 결국 사상 유례없는 집권당의 패배로 끝났다. 이번 선거 패배의 원인은 정부 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 CIA 공작의 결과라는 독특한 시각도 있다.
자칭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남과 북, 해외 청년학생조직’을 자처하는 범청학련과 ‘6.15 남북 선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6.15 남북 공동선언 실천연대는 성명을 통해 소위 ‘박풍’을 불러일으킨 박근혜 테러가 남북 관계를 경색시키고 자주적 통일을 방해하기 위한 CIA 공작이란 주장을 펼쳤다.
이들에 따르면 지난 8년 동안 평화 자주세력의 집권에 위기를 느낀 친미 수구세력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이번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 이를 2007년 대선 승리로 이끌기 위해 박근혜 테러라는 자작극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명에서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가 누구인가를 따져 보면 이 범행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자명하다”며 선거에서의 압승을 위해 한나라당 스스로 이런 일을 꾸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막연히 누구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바로 그 쪽이 범인이라고 단정하기 시작하면 별 우스운 결론이 다 나온다. 박정희 사망으로 제일 덕 본 사람은 전두환이기 때문에 김재규의 배후에 전두환이 있고 김일성이 죽어 전권을 쥔 김정일이야말로 김일성 살해범이란 주장 등등.
이들은 또 2004년 대만 총통 선거에서도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천수이벤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에게 총을 쏘는 자작극을 저질렀으며 같은 해 우크라이나 선거에서도 친서방 유시첸코 후보가 동정표를 얻기 위해 독약을 마시고 얼굴이 망가뜨려져 대통령에 당선된 후 수술로 원상회복 하는 쇼를 연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만의 경우 독립을 주장하는 천수이벤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골칫거리다. 대만 독립을 둘러싸고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미국은 전혀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당선시키기 위해 CIA 공작을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음모론은 대부분 처음 들어보면 그럴 듯하다. 또 이 가운데 나중에 사실로 밝혀지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없이 상상력을 동원해 그럴싸하게 사실을 꿰어 맞춘 픽션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천수이벤이나 유시첸코,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이것이 자작극임을 입증할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음모론은 대개 자신이 저야 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이다. 서민들은 먹고 살기 어렵다는 데 북한에 퍼주기를 계속하겠다는 정부, 자기가 아니면 모두 부패한 역사의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현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민심 이반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CIA의 음모 탓으로 돌리는 소위 ‘평화 자주세력’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한심하다. 제발 정신 좀 차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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