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강풍… 낭떠러지… 고소증 이기고 한 발 한 발 정상으로
“아, 온 세상이 내 발 밑에…”
본보는 지난 19일 ‘인류의 지붕’인 에베레스트(8,848m)를 정복, 한인 최고령으로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이란 신기원을 이뤄낸 산악인 김명준(64)씨의 ‘에베레스트 등정 수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매일 등반 일지를 작성한 김씨는 이번 연재에서 에베레스트의 혹독한 추위, 고독과 싸웠던 생생한 체험을 독자들께 선사합니다.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여기까지 왔는데 발길을 돌려야 하나…
강풍에 실려 온 눈이 연신 텐트를 쳐댔다. 투투툭, 투투툭. 2시간 전 기상상태가 나쁘니 산행은 불가능하다는 셀파의 말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 어차피 나쁜 날씨에 오르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라며 마음을 달래보지만 1년동안 공들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울음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명준, 날씨가 좋아지고 있어. 출발하자고” 셀파인 아파가 소리를 치며 비몽사몽으로 잠들어 있던 어깨를 흔든다. 에베레스트의 여신이 나의 산행을 허락해준 것인가? 부리나케 장비를 챙겼다. 두꺼운 등산복을 뚫으려는 강풍의 기세가 무섭지만 어둠 속에 반짝이는 다른 도전자들의 불빛이 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파는 “명준, 바람이 지금 세지만 계속 날씨가 좋아지고 있어. 하늘이 우리편인가 봐”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귀청을 때리는 강풍에 앞선 이들의 발자국이 이내 지워지지만 발자국만 좇아 걷는다. 어둠이 깔린 에베레스트는 결코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신의 영역인 에베레스트에서는 신의 입김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뿐이다.
높다란 산들 사이로 불그스름한 빛이 고개를 쳐들면서 주위의 산들도 칠흑같은 어둠에서 깨어나듯 하나둘 모습을 내비쳤다. 잠자던 가슴도 뛰기 시작한다.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발코니를 지나니 로프도 없고 아이스 액스(AXE)로 앞을 찍어야만 전진이 가능할 듯 싶다. 조금만 옆으로 잘못 찍어도 눈이 금새 쓰러져 내릴 것만 같다. 천길 아래로 펼쳐진 티벳의 허공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 본다. 하지만 고소로 위험감각이 마비된 때문일까. 앞 사람을 따라 한 발, 한 발 내딛을 뿐이다.
또다시 두려움이 찾아온다. 머리 속의 생각을 지우려하지만 어쩔 수 없나 보다. ‘앞 사람이 혹시 굴러 떨어지는 길로 가는 것은 아닐까’ ‘나보다 체력이 뛰어난 독일원정대도 3번이나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하다 돌아갔는데…’
앞에 거대한 산봉우리가 보인다. 저곳이 정상인가? ‘힘을 내자’며 이미 물리적 감각은 사라진 발걸음을 힘겹게 옮겼지만 이내 정상의 앞에는 또 다른 정상이 버티고 있었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에베레스트의 신기루는 끝이 없다.
강렬한 태양빛이 하얀 눈마저 채색시켜버린 오전 10시50분. 지난 몇 년 동안 내 마음을 뺏아버린 그 곳은 태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해발 8,845 m의 에베레스트 최정상은 그렇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사진과 라마교 경전이 쓰여진 깃발이 펄럭이며 이곳도 인간의 영역임을 내비쳤다. ‘드디어 오랜 숙제를 끝냈구나’ 정상 정복의 떨림대신 긴 여운만이 가슴 속을 메우고 있다.
<정리 이석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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